정의신 '푸른 배 이야기'
강과 바다, 갯벌로 둘러싸여 있는 소래강 하류의 작은 어촌마을, 남촌 도림동, 글을 쓰기 위해 머물렀던 그곳의 사람들은 나를 '통통배 선생'이라 불렀고 지금 나는 그곳과 그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유혹적인 몸짓으로 농을 건네던 뚝방집 여자들, 칠이 벗겨지고 낡은 푸른 배를 강매한 칠복 할아버지, 부모에게 버림받고 여동생과 물고기를 사달라 조르는 동네 어린이들, 나이 많은 미영을 짝사랑하는 광수 오라방과 미영의 남편, 영화라는 것을 보고 혼돈스러워하는 삼식이, 여자에게 모은 돈을 다 바치는 안춘식과 그를 유명작가가 된 나. 사진작가와 촬영을 위해 30년 살아가는 말순이, 도박판에서 잃은 돈을 찾고자 장사를 하는 황목련, 최봉달 부부, 냇가에서 잡은은퇴 후 낡은 배에서 홀로 살아가는 선장, 생전 처음 이용하는 변심, 개성강하지만 착한 이들과 3년여의 삶을 지내던 나는 어느 날 그 곳에서의 삶이 싫증나 도망치듯 마을을 떠난다. 시간이 흘러 30년만에 다시 마을로 돌아간다. 그러나 마을은 완전히 변해버렸고, 나를 기억하는 사람도 찾을 수 없는데…
연극 <푸른 배 이야기>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공연되어 인기를 끌었던 정의신의 작품들과는 괘를 달리한다. 무엇보다 형식부터 그러하다. 무대 위에 독립된 현실적 세계를 구축했던 전작들과 달리, 《푸른배 이야기》에서 정의신은 이러한 리얼리즘의 양식을 파괴한다. 관객에게 말을 건네는 해설자가 등장해 무대와 객석의 벽을 허무는가 하면, 기승전결이 아닌 옴니버스 방식을 사용하여 다양한 에피소트들을 나열한다. 사실 그가 옴니버스 방식으로 이야기를 나열하거나 해설자를 등장시킨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야키니쿠 드래곤>의 극을 여닫는 토키오 역시 해설자인 샘이다. 그러나 해설자가 등장해 옴니버스 방식으로 이 두 가지 방식을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진 형식은 해설자의 등장이나 옴니버스 방식에 있지 않다. 장마다 해설을 맡은 주인공이 바뀌는 다인일역은 <푸른배 이야기>에서 가장 눈에 띄는 표현 방식이다. 말 그대로 하나의 등장인물을 여러 명이 나눠 맡는 방식이다. 일인다역은 익숙하지만, 일억다인, 나인일역은 생소할 수밖에. "원작 소설에서는 한 명의 화자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저는 '내' 안에 여러 다른 '내'가 있다는 생각에서, 여러 배우들에게 한 가지 배역을 주었습니다. 여러 가지 국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하는 사람들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정의신이 말한 원작 소설이란 야마모토 슈고로의 소설 <아오베카 모노가타리>이다. 소설은 한일양국의 갈등의 현대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원작은 도쿄 근교인 지바현 우리야스시의 가난한 어촌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오래전부터 우리아스의 주민들은 바다를 삼아 김과 바지락 조개를 잡기를 생업으로 삼았다. 그러던 중 1983년 도쿄 디즈니랜드가 들어서면서부터 도시와 산업화가 진행되었고, 이후 우라이스에서는 더 이상 가난의 풍경을 진기가 어려졌다. 정의신은 이곳의 이야기를 이성의 남촌 도림등으로 옮겨왔다. 송도 국제도시 개발의 영향을 받아 한껏 도시화되고 있는 소래포구에 면한 곳이다. "오케카모노가타리'의 '아오베카'는 파랗고 하고 못 쓰는 비를 의미합니다. 아름다운 푸른색이 아닙니다. 색이 벗겨져서 허옇다 못해 푸른 배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정작 원작에는 이런 푸른 배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작에는 남녀 간의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옵니다. 사회 언저리의 낡고 쓸모없는 사람들. 푸른 배는 바로 그들의 존재를 삶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 마을 자체가 넓고 푸른 배라고 이야기합니다."
연극 <푸른배 이야기>는 낡아 쓸모가 없어지기 전의 포구마을 배경으로 한다. 그곳의 파도소리에는 뱃사람들의 거친 입담과 둑방집 여자들의 교성이 섞여 있다. 가끔은 미련한 샌님 총각의 비탄이 들려오고, 마누라와 불륜 난 남자들에게 돈을 요구하는 주정뱅이의 주사가 들려오기도 한다. 짭조름한 바다냄새에서는 후줄근한 뱃사람들의 밑 냄새와 음탕한 여인들의 분첩 향이 묻어난다. 가끔은 거나한 술자리의 숙취냄새와 질펀한 사랑 놀음의 밤꽃냄새가 풍겨나기도 한다. 동네바보는 박자에 맞지 않는 춤을 추고, 거지소녀는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뇌까린다. 그렇듯 연극 <푸른배 이야기>에는 이제는 박제가 되어 만날 수 없는 삶의 풍경이 담겨 있다. 바로 거기 정의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 "한일 문제가 아닌 이야기도 많이 썼는데, 크게 소개된 작품들이 그런 작품들(나에게 불의 전차를>, <봄의 노래는 바다로 흐르고>, <적도 아래의 맥베스>, <야키니쿠 드래곤)이다 보니. 제가 대단히 역사적인 대하드라마만 쓰는 사람인 것처럼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대하사극을 쓰건 소소한 이야기를 쓰건, 저는 항상 기억에서 멀어져가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단지 흘러가는 시간 속에 잊혀져 간 사람들 만이 아니라, 사회의 주변부로 밀러나 사라져간 사람들을, 이번에도 그는 변두리 서민들의 왁자지껄한 누추한 삶을 그린다.
<푸른 배 이야기>는 정의신의 지향점이 무엇인가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비록 더럽고 비윤리적이고, 질척거리는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 많은 것들을 견디며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향수, 그런 점에서 항상 중심을 꿈꾸지만 현실 자체는 너무나 비루한 우리네 삶을 이토록 따뜻하게 그려내는 작가가 있다는 것. 분명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정의신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그들의 비루한 살을 따뜻하고 긍정적 시선으로 그려내는 작가로 그의 존재가치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남촌 도림동은 실패로 점철된 한심한 인간관계로 가득 찬 공간이다. 남녀 사이의 사랑과 욕망은 색깔이 모두 다르지만 하나 같이 빗나가고 어긋난 관계 속에 있다. 남호철 선장과 손정순의 살아서 이루지 못한 사랑, 배가 통과하는 짧은 시간동안 서로 바라보며 아무도 모르게 주고받는 애틋한 사랑이다. 목련옥의 최봉날과 황목련 부부는 싸우면서도 생활의 현장인 도박판에서는 함께하는 부부. 그러나 결국은 서로의 상처를 건드려 헤어지는 관계이다. 광수 오라방과 장미영의 빗나간 만남. 꿀나무를 키우려는 순수한 청년과 자유분방한 유부녀의 만남이다. 여기에 미영과 잔 남자에게 돈을 요구하는 남편 박창석까지 겹치면서 어긋남은 증폭된다. 변심에 대한 안춘식의 끝없는 연민, 외도를 밥 먹듯 하는 여자에 대해 그 여자의 상처를 온전히 감싸려는 남자의 무조건적 일방적인 사랑이다. 이렇듯 남촌 도림동에서 남녀의 만남은 모두 빗나가고 어긋나 있다. 반면 어른들의 어긋난 관계와 대비되어 아이들의 모습은 순수하고 긍정적이다. 붕어를 팔려는 탐욕을 잠시 드러내었지만 곧 포기하고 붕어를 그냥 주는 아이들, 끝끝내 영화를 현실과 구분하지 못하는 순진한 삼식이 부모에게 버림받았지만 오두막. 헛간에서 자고 무덤에 올린 음식을 주워 먹으면서도 어린 동생을 포기하지 않고 키우는 만순이, 그래서 겉모습과 옷은 더럽지만 그 안의 몸은 신성한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으로 자라고 있는 그녀. 이렇듯 아이들은 희망과 긍정의 토대로 그려지고 있다.
주인공의 영혼의 고향인 남촌 도림동은 밝고 희망찬 추억도 있지만 추하고 절망적인 추억이 더 많은 곳이다. 그러나 남촌 도림동은 절망과 실의 속에서 진정한 나를 찾고자 했던 고투가 이 추억들을 관통하고 있는 공간이기에 주인공에게는. 그리고 그에게 감정이입한 관객에게도 그 시절 전체가 옅은 색으로 아름답게 채색된 한 폭의 수채화 같은 느낌을 준다. 비추어서 일상적으로는 내가 볼 수 없는 내 모습. 타인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볼지 생각하며 거울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를 대자적 존재가 되게 한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면서 이게 정말 나인가. 나는 정말 나답게 살고 있는가,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르처럼. 진정한 나로 살지 못하고 무언가의 아바타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성찰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거울은 신을 불러오는 무당의 구처럼 영혼의 원초적 고향을 상기하게 하는 신물이 된다. <푸른배 이야기>는 거울 같은 작품이다. 남촌 도림동을 찾아가는 주인공을 목격하고 그에 감정 이입하면서, 영혼의 고향과도 같은 잊혀진 추억들을 각자 되살려 내도록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향에 대한 상기는 진정한 나를 찾게 하는 교두보가 되어 나 답게 사는 출발점을 마련해 줄 수도 있다. 물론 복잡하고 거대한 현대 사회 속에서 진정한 나를 찾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거대한 자본주의체제는 고도의 생산성을 추구하며 이를 위해 노동을 효율적으로 조직화하기위해 엄지주의를 지배 원리로 삼고 있다. 부와 권력의 배분이 업적과 성과에 의해 정해지기 때문에 개인의 삶은 업적을 쌓기 위한 경쟁에 몰입해 다람쥐 쳇바퀴 돌 듯까지 나오지 못한다. 그리고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업적을 쌓는데 모든 일과를 투자해야 하기 때문에 정말 내가 원하는 것. 진정한 나의 쾌락은 포기되고 잊혀 진다. 생존이 쾌락에 앞설 수밖에 없으므로 엄지와 한다는 현실원칙의 지배 속에서 신생한 나의 욕망을 추구하려는 쾌락원칙은 무력하다. 이렇게 되면 일은 쾌락의 부정이 되어 자기실현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자기실현을 막는 활동이 된다. 결국 진정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닌 데도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속에 처해 있다 보니, 일할수록 소외는 심화된다. 20세기 후반 자본주의에서는 이제 나의 욕망과는 상관없이 일반 하게 만드는 소외가 관계라고 비판한다. 이러한 거대한 세계에 맞서는 것이 어렵긴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절망은 죄이며, 실패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희망을 버리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진정한 출발점을 찾는 희망의 출발점은 실의와 고뇌를 극복하고 진정한 나를 찾으려고 했던 그 지점, 영혼의 원초적 고향을 상기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작품이 관객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