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뵐 '결산'

노 부부가 자택의 방에 있다. 병색이 완영한 여인 클라라는 남편 마르틴에게 곧 닥칠 임종 소식을 자식들에게 연락했냐고 다그친다. 남편은 연락했다며 어떻게 자신의 죽음을 알게 됐냐고 다그친다. 클라라는 의사의 말과 자신의 상태로 봐서 오늘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한다. 다시 자식들 얘기로 이어진다. 결혼 38년차인 이 부부에겐 5명의 자녀가 있었고 장녀인 리제로테는 17살에 죽었다. 그리고 알베르트, 딸 클라라, 요셉. 또 지금은 형무소에 수감중인 아들 로렌츠가 있다. 부부는 로렌츠에 대해 올 수 있을지 걱정한다. 마르틴의 친구인 크라머가 현재 장관이라서 그에게 사정을 설명했는데, 몇번의 탈옥 전과가 있어 어려울지 모른단다. 아런저런 자식들에 대한 감회를 얘기하는 부부. 남편도 임종을 맞을 클라라도 로렌츠에 대한 걱정이 제일 큰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말을 안 했던 38년간의 부부생활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전쟁의 상처가 큰 시기에 우연히 만난 이들은 가난과 굶주림을 헤치고 굳굳이 버텨 자식들을 키우고 특히 남편은 변호사, 정부 관료로 능력을 인정받아온 것. 그러나 서로의 불륜(남편은 술집여자와, 아내는 자신의 친구이자 당시 부하인 크라머와)을 알면서도 눈감고 참아왔던 것이다. 얼마 후, 차 소리가 나고, 크라머가 죄수인 로렌츠를 데리고 온다. 아마도 크라머의 보증으로 데려온 것이고 크라머는 잠시 면회하고 곧 돌아가야 한단다. 그러나 클라라는 로렌츠와 단둘이 만나고 싶다고 사정하며 3, 4분의 시간허락을 받는다. 클라라는 마치 사전 준비한듯 로렌츠에게 밖에 차가 있으니 옷을 갈아입고 국경을 넘어가라며 큰 돈과 차키, 여행가방을 준다. 그리고 로렌츠를 창밖으로 보낸다. 그 후, 크라머를 불러 아들이 도망갔으니 잡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한다. 이 불륜 사이였던 이들은 어쩌면 크라머의 일방적인 사랑인 듯하고 클라라는 일종의 보험용으로 그와의 관계했던 것이다. 크라머는 로렌츠를 잡으러 나간다. 그러나 클라라의 주도면밀한 계획으로 아마 국경을 넘었으리라. 그리고 남편이 홀로 보는 가운데 운명을 맞는다.
《決算》은 나중에 〈진실의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劇化되기도 한 작품인데, ‘한 사람의 인간이라도 좋으니 그 사람을 진실로 알기’를 원했던 한 여인이 임종의 시간에 임해서도 그것을 단념하지 않고 추구해 나가는 몹시 박력 있고 뵐의 시적인 감수성을 여실히 드러내 주는 작품이다.

1972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하인리히 뵐은 방송 극작가로서도 널리 알려지고 있다. 방송극이라면 흔히 싸구려 멜로드라마만을 연상하는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는 하인리히 뵐 같은 작가가 방송극에 손을 대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지도 모르나, 풍문에 의하면 西歐에서는 방송극이 문학의 한 장르로서 새로운 藝術形式을 엄연히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방송극은 서구에서도 특히 독일에서 크게 번성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그것은 패전 후의 작품을 발표할 紙面도 무대도 잃었던 그곳 문인들에게는 일찍이 복구된 방송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는 길이 유일한 작품 발표 수단이었던 이유도 있겠지만, - 예를 들어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문밖에서》와 같은 전후 최초의 걸작이 방송극으로서 쓰여진 사실을 보더라도- 원래 그림이나 조각 같은 조형 예술보다는 음악이나 철학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많은 巨匠들을 배출해온 저들 게르만인의 관념적인 국민성에 소리로서만 이룩되는 방송극의 형식이 어느 정도 잘 들어맞는 탓이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한 만큼 그곳에서는 하인리히 뵐은 물론, 다른 쟁쟁한 시인, 극작가, 소설가 등이 방송극에 손대는 것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귄터 그라스같은 걸출한 작가로 방송극 작품을 적지 않이 남기고 있고, 막스 프리쉬나 프리드리히 뒤렌마트같은 극작가는 물론, 게마르 바흐만같은 여류시인도 방송극 작품을 발표해 커다란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귄터 아이히같은 시인은 시인으로서 보다도 방송극작가로서 더 큰 명성을 얻고 있는 것이다. 방송극이 그만큼 번성하고 진지하게 쓰여지고 있는 곳이니 만큼, 그곳에서는 방송극 작품에도 새로운 실험을 해보는 경향이 있고 前衛를 표방하는 난잡한 작품도 나온다. 그러나 하인리히 뵐은 주지하다시피 침착하고 착실하게, 풍자적인 수법으로 인간의 순수성을 인상적으로 쉽고 재미나게 쓰는 작가다. 그러한 그가 한번 방송되는 소리로써 끝나버리는 방송극을 어렵고 난삽하게 쓸 까닭이 없지 않은가. 그의 어느 소설보다도 쉽게 이해되고, 그래서 감명이 빠른 것이 그의 방송극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