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롤드 핀터 '티 파티'

『티파티』는 유럽 방송 연합회의 위촉을 받아 유럽 내 16개 회원국에서의 동시 상연을 목적으로 한 텔레비전 드라마로 1965년 3월 BBC에서 방영되었다. 이 작품은 핀터가 1964년 BBC 제3방송에서 직접 낭독하였고 그 후 1965년에 '플레이보이' 지에 게재되었던 같은 제목의 그의 단편소설을 토대로 한 것이다.
하층민 출신의 주인공이 고생 끝에 자수성가하여 대기업의 총수가 되었다. 그는 최고급 화장실용 위생기기를 제조하는 회사의 총수이다. 최신형 변기, 세면대, 비데 등이 진열되어 있다. 디쏜이 새로운 개인비서를 채용하는 날 저녁, 그는 다음 날 결혼하기로 되어 있는 약혼녀 다이아나의 형제인 윌리를 처음 만난다. 결혼피로연에서 윌리는 다이아나를 칭송하는 축사를 한다. 신랑 측 축사를 하기로 되어 있던 디쏜의 죽마고우인 안과의사 디즐리가 몸이 불편하여 불참하게 되자 월리가 신랑 측 축사도 맡아하기로 했다. 디쏜과 윌리는 바로 전날 밤 첫 대면을 한 처지라 신랑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다. 윌리의 축사는 신부를 치켜 올리는 내용뿐이다. 신랑인 디쏜의 입지가 좁아진 것 같은 분위기다. 디쏜은 느닷없이 윌리에게 자기 회사에 들어와 같이 일해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 윌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기회를 포착한다. 다이아나 - 윌리 남매는 분명 중산층 출신이나 부유한 디쏜과의 결혼으로 물질적 영화를 누려보려는 속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윌리는 얼마 있다 디쏜의 파트너로서 회사의 실권자가 된다. 디쏜은 자신감이 없어지고, 불안감이 팽배해지면 마치 그것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윌리에게 선심공세를 한다. 디쏜의 전처소생인 쌍둥이 아들들은 돈 많은 아버지 덕에 일류 사립학교에 다니고 따라서 그들의 취향도 중산층의 수준이다. 이들은 하층민 출신의 아버지보다는 교양 있어 보이는 새엄마와 외삼촌을 더 따른다. 가정 내에서의 디쏜의 입지는 이미 약해졌다. 디쏜의 체력은 점점 감퇴한다. 마침내 그는 보지도 듣지도 움직이지도 못하게 되어 버린다. 물론 남성으로의 역할도 못하게 된다. 제목의 티파티는 다이아나와의 결혼 일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디쏜이 마련한 다과회다. 물론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장면이다. 우리는 핀터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생일파티'에서 주인공 스탠리가 무너져 버리는 장면을 보았다. 스탠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부의 침입자들이 몰고 온 공포분위기와 위협 때문에 식물인간처럼 되어 버린다. 안경을 빼앗긴 스탠리는 전연 앞을 못 보는 듯 산송장처럼 끌려 나간다. 그런데 디쏜의 경우는 그의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이 외부의 침범이기보다는 (그야 물론 다이아나 남매를 외부의 침입자로 볼 수도 있겠지만) 디쏜 자신의 내부적 불안정함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파티 장에서 의사의 아내 로이스는 왜 칵테일파티로 안하고 티 파티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작가는 디쏜이 붕괴하는 모습을 술 파티에서 보여주는 것보다는 고요하고 단아한 다과회장을 배경으로 보여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서 관객은 대사보다는 무대 위에 벌어지는 감정적 흐름을 통해 사건의 진면목을 파악하게 된다. 윌리가 피로연장에서 다이아나만을 칭찬했을 때 디쏜의 위치는 상대적으로 격하되어 그의 마음은 불안과 자격지심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신혼여행에서 아내에게 내가 행복하게 해주지, 다른 누구보다도 더 행복하게 해주지 하는 끈질긴 질문을 할 때에도 우리는 그의 마음속의 불안정감을 엿볼 수 있다. 디쏜은 때로는 공격적인 자세도 취하지만 아내가 자기를 사랑했었고 감탄했었다고 과거형으로 말하자 회사의 경영주로서, 한가정의 가장으로서, 그리고 남편으로서, 이미 힘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가 유일하게 상사로서 남성으로서 자신감을 갖고 대할 수 있는 상대는 하층민 출신의 개인비서 웬디이다. 그는 눈이 불편할 때면 웬디의 쉬폰 스카프를 빌려 눈에 감고 그녀의 몸을 만진다. 때로는 라이터를 갖고 공치기를 하면서 어린애 같은 섹스게임을 하기도 한다. 전번 고용주가 몸을 더듬는 바람에 직장을 옮겼다는 웬디는 첫날부터 다리를 교대로 꼬며 묘한 분위기로 디쏜의 성 감각을 자극했었다.
디쏜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이 몇 가지 더 있다. 그는 자기 아내가 처남의 비서로 근무하는 것이 불안하다. 둘이 한방에 있는 것도 불쾌하다. 그는 이들이 친남매인지에 대해서 막연한 의심을 갖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비서를 5분만 빌려 달라는 윌리의 전화를 받고 웬디는 옆방으로 간다. 낄낄 웃는 소리, 쉿 하는 소리, 비명소리 등이 들려온다. 집에 갔다던 아내마저 그 방에서 나오자 디쏜은 세 사람의 상호관계 및 혹시나 이들이 힘을 합쳐 공격해 오지 않나 하는 공포에 빠지게 된다. 한번은 저녁 밥상에서 다이아나와 윌리가 느닷없이 웬디를 칭찬하기 시작한다. "대단한 발견” 이고 "회사를 위해서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가치 있는 존재” 라고도 했다. 이들은 이미 회사의 총수가 된 듯한 말을 한다.

이 극의 구조는 한편으로 디쏜의 세력이 쇠퇴하고 이와 반비례로 윌리, 다이아나, 웬디 삼인방의 힘이 커가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쌍둥이 아들들은 아버지가 반대하는 데도 상류층 출신 외삼촌이 옛날에 그랬던 대로 자기 아버지에게 “Sir"(어르신)라는 경어를 쓴다. 친구 병원에서 검안할 때 디쏜의 시력은 완벽하다. 다만 피폐한 심리상태 때문에 보였다 말았다, 둘로 보였다 한다. 다이아나와 윌리는 웬디를 스페인 가족휴가에 초대하고 그녀가 이를 수락한다. 안대를 한 상태에서 디쏜은 많은 것을 상상한다. 여러 장면에서 “디쏜의 관점에서” 또는 “디쏜의 머릿속” 이라는 지문 하에 되풀이되는 일련의 소리들이 연출된다. 파티에 온 실재 인물들이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는 광경이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한편 작가는 디쏜의 머릿속의 상상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파티 장에서의 디쏜은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 웬디가 차 한 잔을 갖다 주는 것 외에는 누구 하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디쏜의 부모, 아들들, 가장 친한 친구인 디즐리 내외 그리고 물론 월리와 다이아나까지도 자기네만의 하찮은 이야기에 몰두하고 있다. 이때 디쏜은 윌리가 다이아나와 웬디를 성적으로 농락하는 환상을 갖고 의자에 앉은 채로 무너져 버린다. 안대를 풀어보니 그의 눈은 멀쩡하게 뜨여진 채로다. 그러나 그는 듣지도 보지도 움직이지도 못한다. 장정들이 들러붙어 디쏜을 의자에서 일으켜보려 하지만 그는 꼼짝하지 않는다. 그는 마치 쇠사슬에 묶인 듯 의자에서 빠져 나오지 않는다.
디쏜은 신분상승의 목적으로 자기와 걸맞지 않는 다이아나와 결혼하여 점잖고 품위 있는 생활을 꿈꾸었다. 그러면서 웬디를 통해 자기의 성적 우월성을 중명해 보고 싶어 했다. 그는 웬디 앞에서 다소 자유롭게 관능적 욕구를 채울 수 있었다. 계층 간의 격차를 극복할 뿐 아니라 남성으로서도 그 능력을 인정받고 싶었지만 두 가지 다 실패했다. 이러한 내적 갈등 때문에 그는 모든 걸 잃었다. 아무도 그를 도와주려 하지도 않았고 또 도와줄 수도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