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장-폴 벤젤 '남아있는 나날들' (원제: 머나먼 아공당주)

clint 2023. 8. 26. 06:32

 

희미한 빛과 밝은 그림자. 밀레의 그림과 같은 무대.

아련한 샹송 같은 사랑노래. 공간이 담긴 계절.

실존하고자 망치 소리, 그 안에 태어나는 금속.

차와 함께 하는 라디오 시간.

침대, 낱말풀이. 드라마 속 병 그리고.... ... 죽음...

 

 

 

조르주와 마리는 은퇴한 노부부이다. 이들은 젊은 시절 사회활동을 하던 대도시 아공당주를 떠나 아담한 시골집에서 은퇴생활을 하고 있다. 마리는 오늘따라 조르주가 보통 마시는 커피 대신 차를 찾는 것이 이상하다며 그 변화가 갖는 의미를 애써 찾아내려 한다. 마리는 또 예상치 못했던 전자제품 외판원의 방문에 어찌할 줄 몰라 하며 기뻐한다. 조르주는 집 한구석에 있는 철공 작업소에 아내가 생일케이크를 들고 느닷없이 나타나자 '성스러운' 남편의 일터를 함부로 찾아왔다며 심하게 역정을 낸다. 이들은 육체적인 늙음과 상관없이 혹은 객관적인 퇴락과 쇠퇴라는 인간의 운명을 모른 체하며 자신들만의 생의 리듬과 흐름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에 어쩔 수 없이 간혹 서로의 과거를 추억하며 서로의 사랑을 되새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갈수록 ‘반복되는 일상과 습관들로 채워진 이들의 평범한 노후생활’에 변화가 발생한다.

극 속에서 이들이 왜 고향을 떠나 이 시골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없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의 내용으로 볼 때 추측되는 것은 있다. '조르주는 공장에서 쇠를 다루는 일을 평생 해왔다'. '아직 왕성하게 일할 수 있는 신체적 조건을 갖고 있음에도 정년제도 때문에 퇴직할 수밖에 없었다.'. '은퇴 후 딸 부부는 이들의 존재를 부담스럽게 여기고 자주 찾지도 않는다.'. '결국 조르주와 마리는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 고향을 떠나 시골마을에서 살기로 했다'. 이런 것들이다.

노부부는 아무런 변화도 없이 지루하기만 한 일상 속에서 서로 아껴가며, 의존해서 살아가지만 소외감, 불안감, 고립감은 떨쳐낼 수 없다. 특히 마리는 남편의 건강이 우려스럽다. 평생을 쇠 다루는 일만 하며 남자의 일과 여자의 일, 일터와 가정을 철저히 분리시켜온 조르주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고쳐 시골생활에 적응해 가도록 하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외로우면 외로울수록 고향 아공당주에 대한 그리움, 또 그곳에서의 추억은 이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머나먼 아공당주〉는 1975년 제29회 아비뇽 축제에 참여하여 장-폴 벤젤의 연출로 7월 22, 23, 24, 25일 '극단 열림'에 의해 초연되었다. 클로딘 피에베는 무대예술을 담당함과 동시에 프랑스와즈 역을, 모리스 쥐니오는 조르주 역을, 앙드레 텡시는 마리 역을 각각 맡았다.

 

 

 

 

 

번역자의 글 - 이선형

요즘 언론에서는 노인 문제에 대해 상당히 많은 시간을 할애 하고 있다. 노인증가율 세계 1위라는 멘트도 들리고 노인시대, 저 출산시대를 맞이하여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자 골몰하는 분위기이다. 인구 감소와 노인 증가는 국운이 걸린 만큼 누구나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유럽은 1970년대 이와 유사한 문제를 겪었다. 역자가 1970년대 프랑스에 유학을 갔을 때 출산장려정책과 노인복지문제를 접하고 실소를 금치 못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똑같은 문제에 부딪치고 있는 우리 현실을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낀다.

은퇴한 노부부의 이야기를 다룬 1975년에 발표된 〈머나먼 아공당주〉는 당시 사회문제를 반영하면서 그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건들이고 있는 문제작이다. 비록 40여 년 전의 작품이나 현재 우리 현실을 감안할 때 이 작품이 우리 사회에 매우 시사적인 작품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은퇴한 노부부의 삶의 모습이 일상극의 형태로 잔잔하게 그려지고 있는 이 작품에는 노인의 외로움, 노인의 성 문제. 자식과의 관계 나아가 사회에서 소외된 노인들의 모습, 늙음의 의미가 암암리에 제시되어 있다. 벤젤의 첫 작품인 〈머나먼 아공당주〉는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각국에서 공연되었으며 1976년 프랑스 최고 창작 비평 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의미를 지닌 이 작품이 이제야 우리에게 소개된 것은 때늦은 감이 있다.

<머나먼 아공당주>는 젊은 배우들의 생동감 넘치는 연기력으로 무대를 구성하기보다는 등장인물과 비슷한 나이의 배우들 이 실제의 감정과 몸짓을 보여줄 때 제대로 그 맛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작품을 번역하면서 전해온 감동을 말로 형언할 수 없다. 그 감동을 직접 무대에서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쳤다.

 

 

 

 

작가소개

장-폴 벤젤은 1947년 생테티엔느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프랑스 동부의 전형적인 노동자 집안이었다. 벤젤은 기계 고등학교를 16세에 졸업하고 19세까지 일을 하였다. 1966년부터 1969년까지 벤젤은 스트라스부르 고등연극원에서 배우 수업을 받았다. 그는 스트라스부르 국립극장에서 연출가 앙드레 스테제와 로베르 지그누의 공연에 출연하였으며, 로베르 지로네스 연출의 대부분 공연에 출연하였고 피터 브룩(Peter Brook) 연출한 〈아테네의 타이몬>에도 출현하였다. 벤젤은 또한 베르나르 샤르트르 (Bernard Chartreux), 필립 고야르(Philippe Goyard), 미셀 라스킨(Micliel Raskine) 등의 연출에도 출현한 바 있다. 벤젤은 1974년 〈머나먼 아공당주>를 발표하면서 극작가의 경력을 시작한다. 이 시기 동안 그는 여성의 언어 모음과 다양한 사건으로 이루어진 〈마리안느는 결혼을 기다린다.〉를 클로딘 피에베와 더불어 공동 집필을 하였다. 벤젤은 피에베와 더불어 자연주의 및 풍자적 모습에서 벗어난 일상 극을 창조했다.1977년 보비니에서 민중들과 함께 1년 동안 노동자의 생활을 한 후 〈앞으로는 1〉을 썼다. 이 작품은 TEP에서 가을 축제 기간에 공연되었다. 벤젤은 계속해서 〈불확실한 사람들,(1979,), 〈대역 1981년>, 베르나르 브로쉬와 공동으로 〈바터 랜드(Vater Land)〉(1983년), <도와주는 사람 1987년>, 〈괴물의 종말 1993년)을 썼다. 벤젤은 자신의 글쓰기 작업과 연출 작업 또는 연기 작업을 분리시키지 않는다. 1979년부터 그는 올리비에 페리에, 장-루이 우르뎅(Jean-Louis Hourdin)과 함께 알리에에 있는 에리쏭에 페데레 그룹을 창설하였다. 그는 특히 배우로서 파스빈더와 (벼락부자 1982년)를, 발레티와 (<가득 찬 상자, 1990년)를 작업 하였다. 연출로는 아를레트 나미앙 (Arlette Namiand)의 극작품 〈정념(Passions)〉올 1985년 탕페트 극장에서 또한 〈새카만 눈동자1991년) 열린 극장의 겨울 정원에서 연출한 바 있다. 또한 엔조 코르만의 극작품 〈사도신경(Credo)〉을 1987년 앙제르의 누보 테아트르에서 연출하였으며 브레히트의 〈어둠 속에 울리는 북>을 1988년 TEP에서 연출한 바 있다. 빌 극장에서 연출한 〈쇼팔로비치의 순회극단〉은 1992년 변방 최우수 연극비평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벤젤은 현재 올리비에 페리에와 함께 아비뇽 창작 국립센터 와 몽뤼쏭에 있는 메 극장에 있는 페데레 그룹의 공동 책임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