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S. 엘리엇 '가족의 재회'
이 극은 1939년 3월에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극장에서 초연을 가진 엘리엇의 두번째의 본격적인 시극이다. 영국의 북부 위시웃에 있는 몬첸시경Lord Monchensey의 저택 응접실에서 이날 이집 마나님, 미망인 에이미의 생일파티를 위하여, 에이미의 누이동생 아이비- 바이올렛 아가싸 그리고 시동생 제랄드와 찰스, 그리고 에이미의 종형제의 딸 메어리 등이 에이미를 중심으로 둘러앉아 날씨 얘기를 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하여 이 얘기 저 얘기를 주고받는다. 이들은 오늘 8년 간의 방랑생활에서 돌아오기로 되어 있는 이 집의 장남 해리를 기다리고 있다. 에이미는 몬첸시경이 집에서 떠난 후 35년 간을 시골의 유서 깊은 이 저택을 지켜 온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지만, 죽음을 눈 앞에 바라보고 있는 노인이고, 막내동생 아가싸는 옥스포드 출신의 교원을 하는 인텔리풍의 독신 여성이고, 제랄드와 찰스는 퇴역군인들. 최연소의 메어리는 30세 정도의 대학 출신의 현명한 지식여성이다. 아가싸만이 해리가 돌아올 것에 대하여 불안을 느끼고 있고 나머지 식구들은 모두가 해리가 돌아와 이 집을 잘 지켜 나갈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모두 해리의 아내가 그를 끌고 나가서 ‘전 유럽으로 세계의 반은 돌아다니며’ 사치를 일삼다가 1년전 대서양 선상에서 어느 날 밤 무슨 이유에서 인지 투신했다고 믿고, 그녀를 험담하는 자리에 해리가 돌아온다. 해리의 등장으로 이 극의 주제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해리는 응접실에 들어서면서 일동이 환영하는 인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저것 봐요. 저게 안 보여요?”라고 외치면서 창문을 향하여 자기에 게는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어떤 것들이 분명히 보인다고 모두가 이해할 수 없는 독백을 지껄임으로써 모두를 놀라게 한다. 이 극의 주인공 해리의 행동이나 말은 우리들 현실세계에 집착하는 정상적인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는 별 차원의 의미를 대표한다. 우리들 세속적인 사람들은 시아가 현상적인 법칙에만 얽매여 내면과 본질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표면적이고 시간적 세계에만 국한된다. 그리하여 사건과 현상 너머에 있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단순히 생성변화의 물질적 측면에서만 해석하고, 자기 중심적이고 감각적인 입장에서 파악한다. <대성당의 살인>에서의 기사들이 바로 그런 세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고, 이 극에서는 해리, 아가싸, 메어리를 제외한 기타의 인물들이 그런 인물들이다. 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정신세계에 살고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가 감각으로써 파악할 수 없는 세계를 본다. 말하자면 그들은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본질적인 면에서 본다. 우리 대부분의 소위 <정상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시간의 세계에만 살고 있다고 말한다면 해리와 같은 사람들은 무시간의 세계에 사는 <비정상적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차원이 다른 두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관점에서 말하기 때문에 서로 이해가 안되고 의사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들의 대화는 동문서답식이다. 해리는 “그저 시간, 시간, 시간, 그리고 변화 변화가 없느니, 얘기만 그것 뿐이군요!…그러면서도 딴 얘기는 하나도 안 하시는군요, 왜 요건을 피하십니까”라고 불경스럽게 말한다.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 사건이란 것은 무의미하다. 즉, 그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을 의식하는 정신적으로 특별히 발달된 사람이다. 그가 눈을 크게 뜨고서 눈에 보 이는 것 너머를 응시할 때에 거기에는 시간의 구분도 없고, 삶이니 죽음이니 하는 것도 무의미한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들이 보았을 때엔 정신병자로 보이지만, 신은 그 사람이 정상적이고, 우리들 <정상적인> 사람들이 바로 병든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엘리엇은 항상 그의 문학에서 해리와 같은 입장에 서서 <영원히 존재하는 세계>에 가치를 두고 한편으론 우리의 현실세계의 무의미함을 여러가지 표현으로 드러내 보인다.
해리의 실재의식은 원죄의식과 직결된다. 즉 그의 깨어있는 눈에 비친 인간은 모두가 아담의 원죄를 짊어지고 있다. 그래서 그 의식을 대표하는 해리는 대서양 선상에서 죽은 아내를 자기가 살해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 때문에 복수의 여신의 추적을 의식한다. 그가 의식하는 죄의식은 우리가 말하는 양심의 가책이란 것보다 보편적이고 한층 근본적인 기독교인이 갖는 인간의 실재에 대한 자각이다.
해리가 돌아와 망상에 사로잡힌 독백을 하자 에이미는 아들의 그런 망상이 피로 때문일 것이라고 해석하여 휴식을 권하고, 바이올렛은 그에게 의사의 진단이 필요하다고 제의하여, 의사 위버튼을 부르기로 했지만, 우선 그 이전에 해리의 여행에 동반했던 운전기사 다우닝의 증언을 들어본다. 다우닝에 의하면, 해리는 <아침에 가라앉는가 하면 저녁엔 개인다는 식>이고, 늘 흥분하고, 자신을 망각하는 일이 있는 신경질적이고, 때로 심령의 세계를 느끼는 것 같이 보였다며, 그 부인은 흥분하기 쉽고 밤에 배의 갑판에 나가 있다가 잘못해서 바다에 빠졌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제2장은 1장과 같은 방. 메어리와 아가씨의 대화에 이어서 주로 해리와 메어리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해리는 어린시절을 같이 지냈던 메어리와 오랜만에 만나 대화를 주고받는다. 해리는 메어리에게 집에 돌아오면 가정이란 곳이 인생이 공허하지 않고 단순해지는 곳으로 생각했는데, “어떤 것에서도 해방이 될 수 없고 간절히 피하고 싶었던 그 그림자들을 피할 수가 없다”고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음을 토로하고, 아울러 고독감· 절망감 같은 것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고 말한다. 메어리가 식사 준비를 하러 간다고 하자 해리는 그녀를 끝내 붙들어 놓고서 다시 얘기를 주고받는다. 메어리는 해리만큼 정신능력이 투철하진 못하지만, 해리의 ‘망상 세계’를 충분히 이해한다. 해리는 지금 자기 집에 돌아와 메어리와 얘기하고 있으면서 의식은 어떤 딴 세계- 햇빛이 비치고 노래소리가 들리는 축복의 나라- 에 가 있다.
제3장도 같은 방, 해리· 메어리· 아이비· 바이올렛· 제랄드· 찰스 등이 모여 앉아 대답하는 중에 메어리가 디너를 위하여 옷을 갈아입기 위하여 퇴장. 테리의 동생 아씨와 같이 늦는 것을 기다리고 있을 때에 에이미가 의사 워버튼을 데리고 등장. 워버튼이 해리와 잠시 대화하며 얼마 있다 모두 식당 쪽으로 간다.
제2부 제1장, 식후 이 저택의 서재에서 에이미의 부탁을 받은 의사 워버튼이 해리와 대화를 갖는다. 테리는 위버튼에게 지금까지 아버지에 관해서 아무것도 둘은 일이 없으니 말을 해달라 하자 워버튼은 해리의 아버지는 해리가 아직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어머니와 헤어져서 외국에 나가 산다가 세상을 떴다고 말한다. 그리고서 워버튼은 에이미의 건강문제에 언급하여, 노령에 이르러 매우 쇠약하였으니 어떤 심려를 끼치는 일은 삼가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지탱한 것은 해리가 돌아와 위시옷을 장악하는 것을 보고자 하는 집념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이때 경사 윈첼이 찾아와 존이 자동차 사고를 내서 부상을 입었다는 것을 가족들에게 알리고 얘기를 나눈다. 이날 집에 돌아오기로 되어 있는 아써도 런던에서 자동차사고를 냈다는 연락이 왔고, 그것이 신문에 나서 모두가 걱정한다. 제1장은 코러스의 운율에 맞춘 발언으로써 끝난다. 코러스는 <대성당의 살인>에서처럼 극중 장면을 초연하고 본질적인 입장에서 바라보고 그 의미를 제시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 장면에서도 그들이 모든 일어나는 일은 과거와 미래로 연결되는 것이며 피할 길도 없는 운명적인 일이라고 이 집에 내린 지주의 필연성을 암시한다. 제2장은 비록 표면상은 해리와 아가씨의 대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전체가 해리의 독백이랄까, 그가 고뇌를 읊어대는 한 편의 시다. 본래 이 극 전체를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특히 제1부 제2장은 사건보다는 시가 지배적이다. 그렇게 보면 아가씨의 대답은 해리의 독백에 대한 응답이고 보충에 불과하다. 해리의 고뇌의식은 그의 원죄의식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죄의식과는 다른 근원적인 인간의 불행의식이다. 아가싸는 인간의 마음의 역사는 죄와 속죄를 탐구해 온 기록이라고 말하고, 해리의 고뇌는 불행한 이 가족의 의식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한다.
해리는 자기가 아내를 죽인 살인자라는 의식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살해할 생각을 가졌던 것으로 망상한다. 그리고 이 위시옷의 고옥에는 저주가 내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 서 그는 계속 복수의 신의 추적을 의식하며 살아왔다. 그는 <그동안의 내 생활이라는 것은 계속 도망치는 것이었고, 내가 도망쳐 다니는 동안 유령들은 나를 뜯어먹고 살아 온 것을 이젠 알겠어요>라고 고통스런 의식을 토로한다.
제3장은 해리가 다시 집을 나가는 것을 안 에이미가 동생 아가싸에게 화풀이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에어미는 남편 몬첸시경이 35년 전에 집을 나간 후 객지에서 죽고, 마지막 희망인 장남 해리마저 집을 나가게 되면 이 집을 계승할 사람은 없다는 절망감에 빠져, 그것이 모두 아가싸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알고서 “너는 내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집과 가구와 토지 이외는” 이라고 원망스런 하소연을 한다. 그러나 에이미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정상적 차원에서만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해리와 아가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가싸는 “해리의 문제는 이 세계에선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고 해결은 다른 세계에서 된 문제”라고 말한다. 해리가 가는 세계는 “이 세계의 죽음을 넘어선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있는 곳이다. 그 세 계에선 죽음이란 말과 생명이란 말이 우리의 세계에서와는 다른 뜻으로 쓰인다. 그러니까 정신적 혹은 종교적 차원의 인간은 그 세계로 가야 하고 일상적 차원의 인간은 이 세계에 살아야 한다. 아가싸는 해리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제각기 자기의 길을 가야 한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기나 메어리는 해리만 한 투철한 정신능력이 없기 때문에 자기들은 “두 세계 사이의 어느 쪽도 아닌 중간지대를 방황하다가 틀림없이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죽어서 지옥도 천국도 아닌 림보 같은 곳에 머물게 될 것을 암시한다.
이 극은 해리가 <자기의 길>로 떠나고 에이미의 죽음이 암시되는 장면에서 끝난다. 이때 일동은 “우리는 이 순간에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 그리고 의당 할 일은 할 수밖에” 라고, 『황무지』 끝부분의 <나는 최소한 내 땅이나 정돈해야 할까?>의 귀절을 연상시키는 발언을 한다. 마지막으로 코러스는, 들어가는 길이나 나오는 길이 같고, 생과 사가 여일한데, 우리는 다만 일상의 세계의 변화만을 바라보면서 <어둠 속에 길을 잃고 있다>고 인생과 우주의 진리를 달관한 목소리를 들려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