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엔다 월쉬 '굴레방다리의 소극'

clint 2023. 8. 9. 15:57

 

연극굴레방다리의 소극은 엔다 월쉬의 희곡 ‘The Walworth Face’가 원작이다.

2008년 우리나라에 초연 이후 세 차례 공연되면서 많은 호응을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서울 북아현동(옛지명 : 굴레방다리) 어느 허름한 연립아파트 지하 . 엘레베이터도 없는 아파트에 아버지와 터울인 아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서울로 오기 고향에서 있었던 할머니의 죽음에 관한 일들을 매일 연극으로 꾸미는데, 연극공연이 바깥세상을 두려워하고 단절된 살아가는 그들의 일상이다. 밖으로 나갈 기회는 오직 마트에 가는 . 매일아침 둘째 아들만이 마트에 가서 똑같은 식료품들을 사온다. 연극에 쓰일 소품(식료품) 도착하면 그들은 먹고, 마시고, 음모를 꾸미고, 태우고, 부수고, 죽이고, 도망치는 잔인하고 난폭한 연극을 시작한다.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아들은 엄마와 삼촌 내외, 어린 시절의 자신들 다양한 역할들을 연기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독재와 심한 대우, 동생에 대한 연민 등으로 아버지와 아버지의 연극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고, 둘째 아들은 자유와 바깥세계에 대한 절망과 염원으로 가득하다어느 날 갑자기 매일 가는 마트의 여직원(김리)이 뒤바뀐 봉지를 들고 집으로 찾아온다.

 

 

미디어와 이데올로기에 지배당하는 현대인은 오히려 자신의 의지와 사고로부터 고립되어 타인의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가족사를 연극으로 끝없이 재연하는 구조이다. 섬처럼 고립된 공간에 갇혀 있는 이들은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지만, 이러한 삶의 형태 밖에 알지 못하기에 자유를 누리지도 못하게 된다. 서로서로 고립되어 살고 있는 지금의 현대인들의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특히 극중극을 선보이는 <굴레방다리의 소극>은 남자에서 여자로, 어른에서 아이로, 1인 다()역을 연기하는 등 다양한 연기를 펼치는 작품이다. 코미디이면서 참혹하고, 침묵하다가 거대한 충돌을 몰고 오는 무대 위의 희열을 통해 현대인의 삶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진실한 삶을 복원하는 과정을 웃고 싶어도 웃을 수 없는 역설적인 블랙코미디로 보여준다.

 

 

서울 굴레방다리(현 북아현동)에 어느 허름한 지하연립에는 아버지와 두 아들이 살고 있다. 방금 장을 봐 온 비닐 봉지를 뒤적이는 둘째 아들 두철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모양이다. 다른 방에서는 큰 아들 한철이 아버지 눈치를 살피며 여자 모양의 가면을 살피고 있다. 거실 가운데에는 굳은 표정의 아버지 대식이 미동도 없이 앉아 있다. 어떤 대사도 어떤 소리도 없이 천둥치기 직전의 고요함이 지하연립을 집어삼킬 기세다. 무대의 적막은 아버지 대식이 녹음기의 버튼을 누르는 순간 끝이 난다. 적막 뒤에 벌어지는 상황은 상상을 벗어난다. 이 방과 저 방, 거실과 부엌을 오고 가며 아버지 대식과 두 아들, 한철과 두철이 벌이는난리 브루스같은 소극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서너 개의 인물을 종횡무진 넘나드는 세 부자의 황당한 이 소극이 이들의 과거 이야기임은 사실 처음부터 알아차리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것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이내 이들이 연변에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 세 부자는 연변을 떠나오기 전 있었던 할머니의 죽음에 관한 일들을 매일 연극으로 꾸미며 지내고 있었던 것 역시 알게 된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연극은 삼계탕이 등장해야 할 대목에서 소시지가 든 국 그릇이 나오면서 중단된다. 아버지 대식은 크게 화를 내고 장을 보고 온 두철은 잔뜩 겁에 질려 몸을 웅크리고 만다. 도대체 이 세 사람은 왜 이런 연극을 하는 걸까? 장성한 두 아들은 어째서 아버지의 눈치만 살피며 맘에도 없는 이 연극을 하는 걸까? 이 궁금증이 증폭될 즈음, 관객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아버지를 찾아 연변에서 온 한철과 두철은 지하연립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바깥세상과 단절되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겁많고 소심하기만 한 첫째 한철은 아버지의 독재로 연극에 대한 증오가 커져가고 있었다. 유일하게 연극에 쓰일 음식재료를 사러 나가는 둘째 한철 역시 자유와 바깥세계에 대한 갈증으로 가득차 있다.

 

 

이야기는 이들의 집에 마트 여직원 김리가 찾아오며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된다. 그녀를 강제로 잡아두려는 아버지 때문에 그녀가 위험해질까 봐 걱정하던 두철은 연변에서 자신이 본 진실을 말하고 만다. 아버지의 연극 속 이야기는 진실이 아니라는 것, 아버지는 자신이 저지른 과거의 잘못을 조작해 끊임없이 반복되는 소극을 연기하게 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이제 두 아들은 이 거짓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 지하연립을 탈출 해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을까? 문만 열고 나가면 되는 지하연립에서 한철과 두철은 밖을 나설 용기조차 내지 않는다. 바깥세상은 위험하며 바깥세상의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아버지의 반복된 이야기에 세뇌되어 버린 한철과 두철의 모습은 답답함을 넘어 연민을 불러 일으킨다. 이 연민은 어디에서 오는걸까? 연극 속 세심한 웃음코드에도 속시원히 웃어버릴 수 없는 이 막막함은 무엇 때문일까? 보호라는 미명아래 반복되는 소극을 강요하는 대식의 모습이 형체를 알 수 없는 폭력으로 뒷덜미를 잡아채는 것은 기분탓일까? 그 즈음이 되면 관객은 대식의 모습이 우리가 사는 현실의 어딘가를 닮아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그리고 한철과 두철은 자신의 의지만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닮아있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그래도 한철과 두철은 어떤 형태로든 굴레방다리 지하연립을 벗어나길 바라기 때문이다. 도망치지 못한다면 불이 켜지고 연극이 중간에라도 끝나버리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물론 바람은 바람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