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게오르크 카이저 '가스'

clint 2023. 7. 11. 15:24

 

게오르크 카이저는 1918년을 전후해 발표한 사회 개혁을 다룬 드라마들에서 사회질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작가의 목표는 정치적인 것이 아니고 순전히 이념적인 것이다. 즉 카이저에겐 사회형태의 물질적 변화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적· 윤리적 변화가 문제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일차로 인간 개인의 변화를 추구하고, 나아가 이에 뒤따르는 사회 변화 및 개혁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 같은 사회 개혁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 <산호>, <가스> 그리고 <가스 2>로 구성된 "가스 3부작"으로서, 카이저는 이들 삼부작에 나타난 개개인의 운명, 즉 억만장자, 억만장자 아들, 억만장자 노동자의 운명을 통해 현대 산업사회의 인간이 새로운 인간이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첫 작품인 <산호>의 주제는 아직 순수한 개인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다. 중심인물인 억만장자는 가난과 불행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하나의 집념으로 대기업 최고 경영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끊임없는 도피의 삶을 살고 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시절 고난과 궁핍을 체험하게 된다. 아버지는 노동으로 피폐해진 몸으로 회사에서 해고당한 뒤 마지막 임금을 갖고서 더 이상 부양할 수 없는 가족 곁을 떠난다. 이날 밤 어머니는 목을 매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러한 상황에 부딪쳐 소년이던 억만장자는 심한 충격을 받는다. 이후 불행과 궁핍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그의 인생철학이 되었으며, 그 결과로 억만장자가 된 것이다. 이제 그는 이렇게 일으킨 재산을 자신과 어린시절 체험했던 공포 사이에 둠으로써 가난과 불행에 대한 기억을 떨쳐 버리고자 한다. 그는 한 달에 한번 "열린 목요일"에 불행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재화를 나누어 주지만 결코 이들을 직접 만나지는 않는다. 외관상으로 자신을 꼭 닮은, 시곗줄에 매달린 산호로만 구별이 가능한 비서로 하여금 그 역할을 수행하게 한다. 비서는 자신의 개성이 전혀 없는, 억만장자로부터 분열된 존재로서 억만장자가 불행과 마주치는 곳이면 어디에나 등장해 그를 대신하며, 동시에 그를 현실의 카오스로부터 보호하는 외적 분신역할을 한다. 억만장자는 또한 자식들에게 어떠한 불행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며, 아들을 "태양이 비치는 해안", 즉 낙원에서 밝은 생을 살게 한다. 아들은 억만장자의 이상적 자아를 대신하는 내적 분신이기도 하다. 억만장자는 아들을 통해 자신이 갖지 못했던 행복한 청춘을 살고자 한다. 이러한 자신의 외적, 내적 분신들을 통해 억만장자는 현실에서 벗어나 아무런 고통과 어려움이 존재하지 않는 주관적 세계로 도피하려 한다. 그러나 부()의 바리케이드도 현실과 현실에 대한 공포를 지속적으로 멀리할 수는 없다. 억만장자의 아들은 아버지를 따르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가 바라는대로 호화 여객선 '바다의 자유'호를 타고 인생을 즐기는 대신 석탄을 나르는 화물선에서 화부로 일하며 가난하고 불행한 자들의 생활을 직접 체험한다. 여기서 그는 내면의 변화를 일으켜 새로운 인간이 되고자 함으로써 아버지의 의도와 정반대 입장을 취한다. 공장에서 폭발사고가 있은 다음 노동자들이 비인간적인 작업 조건을 항의하며 농성을 벌이자 억만장자는 작업을 즉각 재개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해고하겠다고 위협한다. 이에 구세대의 인간과 새로운 인간 사이의 마찰이 일어난다. 아들은 아버지를 살인자라고 부르면서 자신은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들 편에 서겠다며 아버지와의 결별을 선언한다. 발한 억만장자는 탈출구를 찾으며 이렇게 소리친다.

누가 내게 첫날부터 밝은 인생을 줄 것인가? 이제 아들에게선 찾을 수가 없다. (…) 난 누구의 내면으로 들어가 이 불안과 엄청난 혼란을 떨쳐 버릴 것인가? 누가 윤택하고 훌륭한 인생을 갖고 있느냐 나의 인생을 위해?!”

 

 

억만장자는 다른 인간의 영혼으로 도피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유복하고 평화로운 과거를 지닌 비서를 사살하고 산호와 함께 비서의 행복했던 소년시절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그 대가로 그는 자신의 생명을 바쳐야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다른 무엇보다도 더욱 심오한 행복을 얻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다다르게 된 낙원에 대한 상징이 바로 인간을 생의 고뇌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산호인 것이다. 즉 산호는 억만장자에게는 가난과 불행, 공포와 고통이 없는 원초적인 삶을 의미하며, 동경하는 낙원의 고요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산호로의 도피가 이 드라마에서 다루고 있는 빈부 갈등이란 사회문제의 해결책일 수는 없다. 기이한 개인의 운명, 대기업주의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산호로의 환상적 도피는 시선을 사회문제에서 다른 데로 돌리게 한다. 따라서 드라마 의 핵심 문제에 대한 해결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 해결은 사회적 의무를 의식하고 있는 억만장자 아들의 새로운 인간으로의 변화 속에서 단지 암시되고 있을 뿐이다. 카이저는 인간 개혁과 이에 따른 사회 개혁에 대한 희망을 다시 다음 세대에 걸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작품 <가스>에선 억만장자 아들의 인간과 사회개혁에 대한 이념이 민중과 관련해 형성되고 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억만장자 아들은 사회적 책임을 의식하고 행동하는 새로운 인간이다. 이제 그는 아버지가 일군 거대한 사기업을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시키려 한다. 다른 사람보다 더 부유하고 싶지 않다는 억만장자 아들은 "우리는 일하고, 우리는 분배한다!"를 기업의 기본 원칙으로 설정하고, 사장도 임금명세서도 없이 모든 노동자가 기업 이윤에 참여토록 한다. 이렇게 해서 노동자의 임금체제에 획기적인 변화가 이루어진다. 아울러 그는 아버지의 기업경영 방식에 일대 개혁을 단행해 노동자 소득증대를 위한 경영 체제를 이룩한다. 그러나 이 같은 경제 질서는 쉼 없는 노동으로 인한 노동자 자신의 혹사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스스로를 착취하고, 이익의 균등한 분배는 결과적으로 그들의 인간성을 상실케 하는 원인이 된다. 최대의 능률, 노동에의 전력투구, 노동을 위한 노동은 하나의 새로운 산업화 단계인 노동 분업화를 촉진하며 나아가 인간의 기계화를 초래한다. 이러한 고도의 분업화로 인해 신체의 한 부분만이 중요성을 지니게 되고, 노동자는 점점 기계에 종속되어 결국 기계의 노예가 되고 만다. 따라서 노동자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억만장자 아들의 인간적인 착상은 그 본래 의의를 상실하게 된다. 게다가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가스 폭발로 공장은 잿더미로 변한다. 이 사건으로 억만장자 아들은 자신이 마련한 이윤 참여 체제가 인간개혁엔 무용하며, 자신의 사회적 행위가 인간을 새로운 위험에 처하게 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이에 억만장자 아들은 공장재건을 거부하면서 인간을 보호하고 인간에게 자기 존재를 인식시켜 주기 위해 폐허가 된 공장부지에 전원풍의 집단 주택단지를 건설하려 한다. 따라서 그가 모색하는 새로운 해결은 루소(Jean-Jacques Rousseau)가 말한 의미의 낙원을 건설해 모든 노동자들을 자연으로 복귀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노동자들로 하여금 가스 생산을 잊고 진정 새로운 인간, 기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풍요한 대자연에서 인간다운 생활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이제 노동자들은 집회에서 자연으로의 이주냐 아니면 가스 생산이냐 하는 문제를 결정해야 한다. 결국 노동자들은 자연으로의 집단이주 계획을 거부하고, 기술과 생산력 증대가 모든 산업 노동자의 의무라는 기사 의 주장에 설득 당해 그를 새로운 지도자로 택한다. 노동 자들은 다시 가스를 생산함으로써 계속해서 기계의 노예로 머물고자 한다. 이에 억만장자 아들은 최후 수단으로 가스 공장의 휴업을 통고한다. 그러나 임박한 전쟁 때문에 이러한 방위 산업체 휴업을 허용치 않는 정부는 공장을 인수해 가스 생산을 재개시킨다. 실제로 가스는 오늘날 원자력처럼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그 무렵 에너지 산업의 주종을 이루었으며 파괴력과 산업화의 상징이었다. 때문에 설혹 빈번한 가스폭발로 인간 생명이 위협받는다 하더라도 국방을 위해, 경제 질서 유지를 위해 가스는 계속 생산되어야 한다는 것이 정부 입장인 것이다. 결국 억만장자 아들이 민중과 국가 권력에 굴복함으로써 그의 인도주의적 관점에 바탕을 둔 사회 개혁 의지는 좌절당하고 만다.

 

 

마지막 작품 <가스2>에서 카이저는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시도를 계속한다. 여기서도 인간개혁과 인류의 미래가 문제된다. 그사이 가스 공장은 국유화되어 전쟁 만을 위해 가스가 생산된다. 이제 공장은 대 기사(技士)가 이끌고 억만장자 노동자는 억만장자로서 누릴 수 있는 생을 포기하고 노동자들 사이에 뛰어들어 그들과 같은 인간이 되고자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스2>의 주인공 역시 새로운 인간으로 출발한다. 이제 전쟁이 발발함으로써 경제와 전쟁, 그리고 국가의 결합이란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는 가운데 등장인물들은 더욱 유형화되고 비인간화 되어, 마침내는 "청색 형상들" "황색 형상들로 구별된다. 여기서 "청색 형상들은 현재 공장을 지배하고 있는 정부군, 즉 아군이며, "황색 형상들은 이 세계대전의 상대인 적군이다. 전쟁이 적군의 승리로 끝남으로써 이제 가스 공장은 "황색 형상들에게 점령당한다. 노동자들은 이전에 받던 이득과 혜택을 상실하고 적을 위해 가스를 계속 생산해야 한다. 이에 노동자들의 불만이 폭발하고, 대기사는 이들의 이러한 수동적 저항을 조장하고 지지한다. 그렇게 해서 공장 작업이 중단되자 "황색 형상들은 가스 공장을 포위하고서 작업을 재개하지 않으면 공장을 파괴하겠다고 위협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억만장자 노동자와 대기사가 노동자들에게 근본적으로 다른 해결 가능성을 제시하게 된다. 다시 옛 인간인 대기사와 새로운 인간인 억만장자 노동자가 대립하면서 노동자들을 자신의 주장으로 이끌어 가고자 한다. 대기사는 적과 투쟁할 것을, 그리고 그 적들을 자신이 발명한 새로운 독가스로 섬멸할 것을 주장한다. 반면 억만장자 노동자는 그들에게 관용자가 될 것을 호소하고 그들 내면에 있는 자유롭고 인간적인 나라로 복귀하도록 설득한다. 즉 억만장자 노동자는 억만장자 아들의 루소적 낙원 대신 '내면의 나라'를 강조하고 있다. <가스> <가스 2>에서 억만장자 아들과 억만장자 노동자 둘 다 인도주의적이고 사회적인 목적을 위해 노력하지만, 전자는 이익분배와 자연으로의 이주 계획에서 물질적 균등이란 목표를 제시한 반면 후자는 인간 내면세계를 강조함으로써 완전히 비 물질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는 노동자들에게 자의식 고취와 인간 존재의 정화를 요구하면서 인간성 회복과 내면으로의 복귀를 주장한다. 여기서 카이저는 억만장자 노동자의 주장을 통해 사회 질서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경제적이고 물질적인 요인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요인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억만장자 노동자의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설득과 호소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들의 현실적 입장을 대변하고 그들의 본능과 충동을 함께 느끼며 모든 외부세력 격퇴와 공장 주인으로서 노동자를 주창하는 대기사를 따른다. 이로써 다시 옛 인간이 새로운 인간에 대해 승리를 거둔다. 또다시 거부당한 새로운 인간은 복수자로 변해 독가스 폭탄을 투척하여 자신 과 함께 모든 인류를 멸망시킨다. 우리는 이 같은 새로운 인간의 복수 행위에서 자기를 끝까지 거절했던 인류를 이제 자기 쪽에서 거부하는 고독하고 배척당한 초인의 분노를 느낄 수 있다. 새로 개발된 독가스에 의해 인류가 자멸하고 마는 이 그로테스크한 종말은 카이저의 예언자적 재능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원자폭탄을 사용한 2차 세계대전 당시도 그랬지만, 오늘날 우리 인류 역시 항상 핵무기의 위험 아래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20년에 무대에 오른 이 드라마는 섬뜩한 인류의 미래 상을 제시한 경고적 시대극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