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고타 크리스토프 '길'
먼 미래의 어떤 시대라고 상상하자.
땅은 모두 콘크리트로 덮여 있고, 길 밖에 없다.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길에서 태어나고 길에서 살아간다.
그들은 차가 순환하며 운행하도록 건설된 길을 걷는다.
자동차는 오래전부터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버려진 고물일 뿐이다. 사람들은 그런 자동차들을 '피난처'라고 부른다.
인류는 원시시대로 돌아가버렸고, 문명의 시대는 그저 '전설'로만 알려져 있다.
전설은 태양, 별, 땅, 진흙, 꽃, 풀, 나무, 그리고 집들을 이야기한다.
미신일까, 사실일까? 어떤 이들은 사실이라 믿고 있다.
또 다른 어떤 이들은 태초부터 지구는 콘크리트와 안개로 뒤덮여 있는 거라 생각한다.
의문점들은 다음과 같다. 이 길들은 어디로 이어지는가.
끝이 있는가. 방향 표지는 왜 있는 걸까.
우리는 왜 걸어야 하는가. 출구는 있는가.
이 길들은 실제인가, 허구인가.
하지만 안심하시라. 지금으로서는 모든 것이 악몽일 뿐이다.
한 '도로 건설업자'의 악몽.(작가 서문)
「길」의 주인공은 건축가이다. 일반 건축가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도로를 짓고 싶은 건축가이다. 그래서 이름도 에드몽 뒤베통 Edmond Dubéton이다. 에드몽은 영어의 Edmund와 같은 이름으로 '부유한 보호자rich protector'라는 의미가 있고, 뒤베통은 콘크리트를 뜻하는 프랑스어 du béton과 철자가 같다. 건설업을 보호하는 사람인 것이다. 이런 그의 꿈은 현실이 되어 시장이 축하피로연까지 열어준다.
무대는 모든 것이 흑백으로 이루어진 회색에 가까운 그리자유(단색) 같다. 콘크리트색이 연상된다. 작가는 지문에서 이 이야기가 건축업자의 악몽이라며 안심하라고 말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더 현실처럼 다가온다. 도덕과 법이 사라진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 잔존하는 에너지인 가솔린을 탈취하려는 폭력만이 존재하는 영화 <매드맥스>처럼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그린 느낌이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도시를 찬찬히 둘러본다. 흙을 보는 것이 쉽지 않다. 기껏해야 시에서 조성한 가로수나 도로변 화단의 흙이 전부이다. 도로를 깐다는 명목으로 흙을 전부 콘크리트나 아스팔트로 덮어버렸다. 우리는 자연에 존재하던 흙을 돈 주고 사서 화분에 담아 식물을 키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길만 존재하는 세상'이 아주 가까워 보인다. 땅이 없으면 식물이 자라지 못하고, 식물이 자라지 못하면 먹거리가 사라진다. 먹거리가 사라지면 서로 잡아먹을 수밖에 없다. 작가는 이러한 세계를 상정하고 일어날 수 있는 상황들을 그려낸다. 태양과 자연이 있던 전설의 시대를 꿈꾸는 사람들도 있고,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도 있다. 여기서 죽음은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타인의 죽음이다. 학자는 성경을 발견하고 스스로 읽는 법을 배운다. 세상과 반대의 길을 가는 사람도 있다. 사랑하지만 만날 수 없는 연인도 존재한다. 바보(미친놈)도 존재한다. 세상은 이 바보에 의해 새로운 창세기를 맞이한다. 죽은 연인을 묻기 위해 콘크리트를 깼는데, 흙이 발견된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땅에 묻자 풀들이 자라나고 열매가 열린다. 죽은 사람을 식량으로 여기는 시대 라, 바보는 시체를 땅에 묻었다고 비난 받는다. 하지만 그 땅에서 자라난 사과나무가 안개를 걷고 태양을 불러온다. 다른 이들은 바보를 미친놈이라고 하면서 길을 떠난다.
악몽 속을 헤매다 사과나무를 발견한 뒤베통은 천국이라며 달려든다. 바보는 이곳은 자신의 천국이라며 그를 막는다. 모든 이는 자신만의 천국을 가지고 있다며, 뒤베통의 천국은 도로라고 정의 내려준다. 자신이 만들었으니 최후의 날까지 그 길을 돌라고 일갈한다. 그제야 이곳이 지옥이라고 뒤베통은 울부짖는다. 이야기는 악몽에서 깨어난 뒤베통이 운전석에서 죽는 순간 끝이 난다. 작가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콘크리트 바닥을 깨면 자연스럽게 천국이 우리에게 찾아온다는 것. 따로 씨앗을 뿌릴 필요도 없다. 이미 뿌리는 콘크리트 밑에 살아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을 그대로 구현한 작품이다. 신은 하늘에 있지 않다. 자연 모든 것에 신은 깃들어 있다. 자연을 살리면 자연이 우리를 살린다. 작가는 이런 희망을 갈구하지만, 추신을 덧붙임으로 써 그래도 인간은 도로 건설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적인 예언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