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성난 사람들'

clint 2023. 6. 13. 19:39

 

<성난 사람들>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1791년과 1792년 사이에 쓰기 시작했고, 1817년에 그의 작품집에 포함된 미완성 희극이다. 부제에서 이미 나타냈듯이, 괴테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희극적 성격의 "정치적 5막극을 계획했다. 주인공 브레메 폰 브레메펠트는 마을 이발사로 존경받고 싶은 욕구가 강하고 희극적이고 외람 된 인물로, 헤센 공국의 몇몇 마을이 프랑스로부터 유입된 혁명적 사상에 자극을 받아 백작에게 대항해서 공동으로 봉기를 시도한다. 이전 백작이 그들에게 보장한 권리를 되찾으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봉기는, 백작부인이 파리에서 돌아와 자신의 책임을 잘 알고 숙고해, 이미 주민들의 정당한 요구를 충족시키도록 조치해 놓은 덕분에 공허하게 끝난다.

괴테의 다른 희극 계열 작품들 특히 <시민장군(Der Bürgergeneral)>을 쓸 때와 마찬가지로, <성난 사람 들>이 쓰이기까지 두 사건이 주제와 장르면에서 영향을 끼쳤다. 하나는 1791 5월 괴테가 바이마르 극장을 맡아 이 극장의 대표할 만한 레퍼토리를 걱정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프랑스혁명 발발로 독일에 일어나기 시작한 동요와 역사적 어려움을 생산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할 필요성에서 였다. 처음 두 작품, <그로스콥타(Groskophta: 비밀결사 '프리메이슨'의 우두머리)>'와 앞서 언급한 <시민장군>은 성공하지 못했다. 전적으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관점들을 풍자와 희극 형태로 그렸기 때문이었다. 그에 반해 <성난 사람들>은 결정적인 점에서 두 작품과 구분된다. 즉 여기서는 혼란이 가시화될 뿐만 아니라 혼란의 전형적인 특성이 나타나며 그 시기의 정치적 불안을 견디고 극복할 수 있는 어떤 질서가 있다고 여기게 한다.

1792 7월 라인하르트에게 보낸 편지가 이러한 의미에서 해석될 수 있고, 이 희극의 작업은 극장을 맡고 난 직후에 시작된 것이 틀림없다고 본다. 이 작품은 완성되지 못했고, 분명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괴테가 여러 차례 작품을 출판하려고 원고를 다시 찾아올 기회가 있었을 때도 작품을 완성하지 않았다. 1817년 코타 출판사판 제10권에도 미완성작품으로 인쇄되어 나왔다. 미완성 부분은 대사 없이 내용 설명으로 채워졌다. 괴테는 오랫동안 주인공의 이름을 희극 제목으로 택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1814 7 17일 일기에는 이 작품이 "브레메 폰 브레멘펠트"라는 제목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희곡이 인쇄될 때 괴테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제목으로 결정했다.

 

 

희극의 줄거리는 어떤 재판을 모티브로 전개된다. 권리 분배 문제로 대를 이어가며 지주와 마을 사람들 사이에 긴장을 일으켰던 재판이다. 여기에 몇 가지 지엽적인 모티브들이 연결된다. 소송 관계자들이 프랑스혁명이 발발하자 이에 자극받아 소송이 다시 중요성을 갖게 되는 것이 극적 사건 초기의 상황이다. 이전 사건들은 <성난 사람들>의 분위기를 형성하도록 새로운 사건들과 결합된다. 지주의 지배에 대항하는 인물이 바로 외과의사이자 이발사인 브레메 폰 브레멘펠트로 괴테는 그 이름을 이 작품 제목으로 삼으려 했다. 그는 덴마크의 작가 홀베르크 (L. V. Holberg)의 희극 <정치적인 이야기꾼(Der Politische Kannegießer)>(1722)에서 따온 인물이다. 혁명가들과 갈등하는 인물은 백작부인으로, 방금 프랑스여행에서 돌아왔다. 파리에서 역사적인 여러 사건을 직접 경험하고 거기서 통찰력을 얻어 이 다툼을 탁월한 방법으로 조정한다. <성난 사람들>이 비평의 부정적 시각을 긍정적인 것과 결합시키면서, 초기 혁명을 다룬 희극 중에서 일정 부분 뛰어난 점이 있다면, 무엇보다 백작부인의 중요성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백작부인은 순수하고 긍정적인 질서의 가능성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괴테는 1824 1 4일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혁명에 대한 입장을 밝히면서, 이 작품이 그 시절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대한 고백이라고 말하고, 이 희극에서 혁명의 중심역할을 백작부인에게 부여했다고 한다. 백작부인이 내린 결정의 중요성은 무엇보다 궁 정 고문관과의 대화에서 나타난다. 이 대화들에서는 앙시 앵레짐의 신분질서가 시대를 초월한 전형적 양식이라는 것이 자명한 듯 전제되고 있으나, 이러한 전제와 함께 신분상 특권이 권리뿐만 아니라 의무도 포괄한다는 확신과 결합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백작부인은 자신과 같은 신분의 사람들을 비판하기를 꺼리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위에 모든 사회적 불의를 피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리하여 백작부인은 궁정 고문관에게 자신을 도와 지체 말고 불행한 소송이 공정한 결말에 이르도록 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 작품은 희극으로 구상되었고, 희극적인 분위기는 주인공에게서 나타난다. 순수한 희극성은 가상과 실제 사이의 균형이 깨지는데 있고, 희극성의 효과는 무엇보다 과장된 가상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해체되는 곳에서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브레메 폰 브레멘펠트는 희극성의 모든 특징을 갖추도록 구상되었다. 허위적 가상은, 브레메가 지치지 않고 자신의 평범한 인격을 가능한 한 모든 역할로 포장하려는 노력에서 명백하게 나타난다. 자신의 출신을 알리려는 의문스러운 시도에서부터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훈장을 받은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것은 농민들과 함께하는 맹세장면과 함께 극히 제한된 마을의 소수 인원을 봉기에 동조하게 하면서 절정에 이른다. 브레메가 말하는 장면에서 언어의 특징은 모두 이러한 과장과 자만심으로 이루어진다.

이 극이 형식에서 희극의 모든 조건을 갖추었다고 해도 본질 면에서는 부족하다. 예컨대 클라이스트의 <깨진 항아리>에서도 허위적 가상의 폭로가 일어나지만 허무하고 공허하게 끝나지 않는다. 마지막에는 전형적인 방식이라 할 수는 없지만 확실하고 파괴되지 않는 생명력을 분명히 보여 준다. 이러한 순수한 바탕이 <성난 사람들>에는 결여되어 마지막에 남는 것은 공허함 뿐이다. 이 희극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주인공의 실체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의 근저가 되는 역사적 동인은 무엇보다 보수적 동기를 지적할 수 있겠다. 백작부인의 태도는 근본적으로 작가의 태도와 일치하는데 그녀는 어떤 질서가 구조상 시대 변화와 관계없이 존재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변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이러한 질서를 어떻게 실현하고 성취하는지 그 양식과 방법일 뿐이다. 그 점에서 특정한 역사적 발전이 명백해지는데, 그것도 인간성 획득을 통해 특징지어지는 발전이다. 이러한 인간성의 미덕은 역시 백작부인의 인간적인 위상과 장점에 영향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와 같이 백작부인은 자신의 신분에 포함된 책임감과 - 괴테의 인간성에 대한 사상에 들어있는 보수적 요소들은 항상 주목해야 한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호의를 결합시킬 줄 안다. 인간성이란 괴테에게는 적어도, 어떤 방식으로든지 포괄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간성이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서 형이상학적 의미로 이해되었다면, 혁명에 관한 이 희극에서는 그 인간성이 역사적 가능성 안에서 형상화된다. , 귀족은 백성의 요구를 알고, 반대로 시민은 움직일 수 없는 계급구조의 전체를 통찰할 수 있다는 전제 안에서 그려진다. 괴테의 다른 위대한 희곡, 특히 <자연의 딸(Die natürliche Tochter)>(1803)과 비교해 <성난 사람들>이 문학적으로 부족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 시대 실존의 심각성이다. 시대는 생산적 의미에서 변화를 겪게 되지만 그 변화들이 지나치게 자명한 듯 일어나고 있다. 다시 말해 위대한 희곡문학에서 긴장감을 일으키는 모든 것이 이 희곡에는 빠져있다. 그래서 이 희극이 미완성으로 남겨진 채 괴테가 <자연의 딸>을 구상하면서 뒷전으로 물러나게 된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이 작품은 위대한 혁명의 기본 원칙을 희극적 인물이 주장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에 진지한 논쟁을 회피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동시대인들에게 호응을 얻지 못했다. 괴테는보수의 친구라고 비난받기도 했지만, 이 작품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기존 질서가 백작부인의 인식을 통해서, 하층계급의 혁명적 봉기는 높은 사람들의 부당함의 결과"라는 인식 덕분에 보다 공정한 질서로 변화되기 때문이다. 괴테의 확신, 즉 인간의 관용은 모든 갈등을 제거해 혁명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정치적 비극을 희극으로 만들게 했다. 아마도 당시의 현실이 이러한 확신과 기대에 상반되었기 때문에 작품이 미완성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Johann Wolfgang von Goeth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