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무라 소우 '눈 속을 걸어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밤, 신코와 칸코 자매는 고모네 집에 다녀오던 중 숲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게 된다. 바로 이때, 이들 자매 앞에 신비로운 여우가 모습을 드러낸다. 여우 콘사부로는 금기의 숲, 일곱 숲 속에 있는 ‘여우 비행학교’의 <특별 체험입학 초대장>을 건넨다. 여우의 권유에 이끌려 환히 빛나는 은빛 눈의 신작로로 발을 들이는 신코와 칸코 자매.
신코와 칸코 자매가 도착한 일곱숲 속 여우 비행학교는 기억의 부피만큼이나 시간과 공간이 혼재된 곳이다. 봄의 나비가 나는가 하면, 한여름의 토마토나무 아래 시냇물이 흐르고, 황혼 속에 가을의 낙엽이 진다. 이곳에서 인간의 상식은 그저 미신에 불과할 뿐, 여우들은 인간의 시공간을 뛰어 넘는 여우의 과학, 여우의 철학을 공부하며 춤추고 노래한다.
이제 오늘 수업의 마지막 순서인 안탄퐁 포칸 알레의 특별강의. 안탄퐁 박사는 손 안에 담긴 달빛을 통해 우주의 신비를, 신의 마음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달빛을 미분하고 또 적분하며, 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작디작은 소립자로부터 온 우주를 가득 채우는 하모니에 이르는 강의를 듣는 동안, 신코와 칸코는 휘몰아치는 눈보라 한가운데서 길을 잃었던 자기들의 모습을 기억해낸다. 이윽고 여우들과 헤어져야 할 시간. 여우 신코, 여우 칸코와 인간 신코, 인간 칸코의 손이 닿자, 불현듯 거대한 에너지로 눈의 무지개가 피어나고, 어느덧 신코와 칸코 자매는 애초에 길을 잃었던 숲 속 그 자리로 돌아와 있다. 손에는 발갛게 빛나는 여우의 토마토가 쥐어진 채로.

<눈속을 걸어서>는, 만화영화 <은하철도999>의 원작이 된 <은하철도의 밤>으로 유명한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 <눈길 건너기(눈을 건너서)>에서 모티브를 얻어 일본의 유명한 현대 희곡작가 기타무라 소우가 독특한 성장우화로 빚어낸 연극이다.
이 작품은 신코와 칸코라는 두 어린 자매가 눈보라 속에서 만난 여우들의 신비한 세계를 극장만이 허락하는 다양한 상상과 유희로 펼쳐놓는다. 스스로를 ‘아주 과학적인 동물’이라 주장하는 여우들이 늘어놓는 이야기, 노래와 춤은 무척 유쾌하고 재미나면서도 현대 문명의 틈새 속에 숨어있는 과학적 상상력을 극대화시켜준다.
우리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있는 사이, 우리의 일상 안에서 고요하게 흐르고 있는 우주적인 운동을 즐기고 사색하는 하룻밤, 서정동화 같은 꿈과 과학적 상상력이 어우러지는 여우들의 숲에서 관객들은 신코와 칸코의 독특한 성장의 시간에 동참하게 된다.


극작가 기타무라 소우 (北村 想)
1979년 초연한 <호기우타>로 일본 연극계에 혜성처럼 출현한 기타무라 소우는 주로 나고야에서 활동하며 극단 프로젝트 나비를 이끌고 있다. 1984년에는 <열한 명의 소년>으로 기시다쿠니오 희곡상을, 1990년에는 <눈속을 걸어서 제2고 달의밝기>로 기노쿠니야 연극상 개인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 중 <호기우타>는 일본 현대연극을 <호기우타> 이전과 이후로 나눌 만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지금도 여전히 불후의 명작으로 추앙받고 있다. 영어, 러시아어 등으로도 번역되었으며, 한국에서는 1999년 서울공연예술제 해외초청작으로 공연되어 큰 호평을 받게 된다. 이후 기타무라 소오와 한국 관객의 인연은 김동현 연출이 극단 백수광부에서 연이어 상연한 <나사와 시계추>(한국공연명: 고래가 사는 어항), <눈 속을 걸어서> 등으로 이어지며 한국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