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 아루 '위위'
1944년 독일 수용소에서 두 명의 사형수, 유태인 라파엘과 친위대원 막스는 마지막 밤을 한 감방에서 보내고 있다. 이것은 전직 친위대원과 유대인 사이의 일시적인 동거에 나치의 은밀한 계략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이 둘은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죽이라는 명을 받는다. 폭력이 이 작품의 일차적인 반응일 수 있지만, 작가는 여기서 우리에게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종교에 대한 의문의 여지없이, 인간의 조건이 우선 다루어진다.
그들이 여행하는 길, 구불구불하고, 장애물에 의해 막히고, 진보와 좌절, 고통, 경이로움, 부드러움, 분노, 공황으로 이루어진 길은 무한에 활짝 열린다. 낙관주의의 배경에 대한 비극적인 주제. 가브리엘 아루가 자신의 유언으로 여겼던 이 마지막 작품에서 그는 첫 번째 주제로 돌아가, 모든 사람은 믿음이 충분히 강하다면 기적을 행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작가의 텍스트는 넓은 의미에서 인간에 대한 찬가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인간에게서 그것의 가장 좋은 면, 즉 인본주의를 느끼게 한다. 큰 이야기는 각 캐릭터가 죽음의 문턱에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작은 이야기와 혼합된다.
“나는 항상 모든 것이 반대하는 두 존재(민족적 기원, 정치적 신념, 종교적 갈등..)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고 특히 서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악보처럼 각 캐릭터가 자신의 것을 따르고, 마침내 동의하고 함께 연주하고,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갖고, 불행 속에서 형제애를 인식한다. 이 이야기는 모든 것이 반대하는 두 존재가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한 증오에 대해 궁금해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이 스스로에게 의문을 품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상황의 잔혹함이며, 이 과정에서 그들은 점차 자신을 벗기고 사회적 성격을 버리고 본질적인 것만 유지한다. 처음에는 모두가 서로를 찾고, 서로를 모욕하지만, 마지막 순간, 더 잘 이해하고 서로를 알게 된다. 이 "만남"은 처음에는 다소 진부해 보일지 모르지만 작가는 그것을 진정한 인본주의적 만남으로 만든다. 실제로 위험은 이 두 캐릭터의 근본을 감안할 때 서로를 미워할 수 있다는 것이기에. 또 작가가 제기하는 질문은 왜 인간이 자신이 모르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학대하고, 증오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다른 사람과 토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결국 다른 사람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기 위해 그를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넓은 의미에서 인간은 무엇보다도 삶을 즐기기 위해 살고 있지만 그러나 여기서 인간은 악한 것만큼이나 선으로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재미있는 동물"이란 것이다.
두 시간 가까이 두 명의 죄수가 어두컴컴한 감방에서 연기하는 이 작품은 나찌 정권을 반역한 罪로 감금해온 Hitler의 친위대원인 맥시밀런· 폰· 웨스케, 파리에 살던 유태인 재단사 라파엘 슈마우스, 새벽녘의 사형까지 상대방을 죽이면 살려주겠다는 보장을 받는다. 구성인이 나찌 · 유태 관계로 우리는 서로의 공격을 쉽게 생각하나 둘은 우여곡절 끝에 함께 깨끗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이야기다. 라파엘의 죽음에 착한 공포, 그들의 행위(오락물의 유희)에 처한 막스의 염증에서 종교, 이념을 초월한 대화에 이르기까지 상상을 벗어나 무너져 버리는 그들의 적대감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찌인과 유태인 누구나 나찌 정권의 학살. 유태인의 희생으로 단정짓기 때문이다.
전후작가들이 전쟁의 고발, 보고, 증언을 하며 인간의 근본 문제를 제시해 주었다면, 가브리엘 아루는 인종이 다른 두 인물을 등장시켜 전쟁 이면에 숨어있는 야욕. 자기독재를 부정하며 Hitler를 꼬집었다. 전쟁을 부정한 것이다. 아무튼 전쟁은 神과 人間을 향한 무서운 행위임에 틀림 없다. 우리가 이 作品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은 체험하지 못한 시대의 일이라 어려움이 있으나, 내일의 처형을 앞둔 두 사형 수들이 던져주는 사회, 인간, 평등, 계급의식을 고발하는 정의와, 전쟁의 不必要性, 한계적 상황에서 인간의 한계를 추정하는 데에 깊은 안목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우선 왜 "Oui"라고 했나? “Oui”라는 단어는 인간의 언어 중에서 가장 깨끗하고,가장 솔직하고 가장 명료하며 어쩌면 또한 인간의 언어 중에서 가장 부드럽고 확실히 가장 덜 보호하며 가장 너그러운 말일 것이다. 요새같은 시대는 "Non"이라는 거짓되고 깊은 아무 의미도 없는 그런 단어가 용기, 지력(intelligence) 품위의 상표로 된 시대이며 또, 줄곧 어떤 사물이나 어떤 사람에게도 아니다(Non)라고 말하지 않은 사람은 곧 나약하고 무기력하고 비겁하며 환심을 사려는 생각을 가진 자라고 비난받는 시대며, 세상에 어려운 행동이며, 인생에 혹 사람들에게 ‘Oui’ 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드물고 어쩌면 바보 같은 용감한 일일 것이다. “Oui” 그것은 희망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이다. 그리고 그 영웅적인 말을 입 밖에 낸 이상 그 책임을 져야 한다. Oui는 나름대로 하나의 용감한 연극이다. 나는 이 연극이 어느 정도로 어떤 형식주의, 도덕적 안심과 타인들에 대한 자만심을 흐트려 놓았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연극이 다수의 사람들이 딛고 있는 단단한 땅을 빼앗아 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이 연극이 자기 마음에 받아들이기 보다는 쉬운 무기나 멸시의 빈정거림 혹 아주 친절한 관용으로 방어하기를 선택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