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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만 '홍경래'

clint 2023. 5. 10. 10:46

 

해방기 희곡 <홍경래>는 남궁만이 쓴 유일한 역사극으로 해방 이후의 역사적 전망을 과거인물의 혁명성을 통해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홍경래>의 1막에는 홍경래와 홍이팔, 김택연, 우군칙 등이 만나는 계기가 설명되어 있는데 이는 곧 훗날에 이들이 봉기를 일으키게 되는 원인이 설명되는 것이기도 하다.  김택연은 과거 급제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홍이팔 역시 세도가의 무리들에 대해 비판하는 등, 평안도 차별에 대한 인식이 대사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차별’에만 있지 않았으며 여기에 정치 경제적 문제가 결부되어 일어난 사건이 바로 홍경래의 난, 곧 평안도 농민전쟁이었다. 극적 형상화 방식을 염두에 둔다면, 농민에 대한 착취를 강조하여 민중 봉기의 인과 관계를 마련하는 것이 극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방식에 있어서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홍경래>에서는 김택연과 홍이팔 그리고 홍경래를 좌절시킨 서북인에 대한 차별로 인해 촉발된 것이 홍경래의 난이며 농민들이 가담하는 것은 그 이후의 일로 전개된다. 우군칙, 김창시, 홍이팔(홍총각), 김택연 등 홍경래를 적극적으로 돕는 인물들뿐만 아니라 홍경래를 암살하려고 한 김대린과 이인배까지 <홍경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심랑과 월설과 같은 여성 인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인물들이다. 남궁만의 <홍경래>가 홍경래의 영웅적인 면모를 강조하는 정치적 우상화보다 역사적 사건의 사실성을 토대로 창작된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조명되어야 한다. <홍경래>에서 홍경래가 지닌 영웅적인 면모는 전략에 능하고 무에 도통한 모습만이 아니다. 홍경래는 봉기할 날을 두고 갈등하는 우군칙과 김창시를 모두 설득할 만한 강직한 소신을 지녔으며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에 머물렀을 때 만난 월설에게 따뜻하고 솔직한 말을 하는 등 자상한 성격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홍경래는 힘과 지력과 권력뿐만 아니라 믿을만한 인품까지 갖춘 자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로 인해 홍경래가 꿈꾼 혁명은 비록 실패했으나, 그 실패한 혁명이 남긴 힘의 지속성에 대해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든다. 혁명이란 성공과 실패의 유무를 떠나 변혁의 의지가 세상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눈앞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홍경래>의 결말은 홍경래가 관군의 총에 맞고 죽는 역사적 기록상의 결말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홍경래 불사설’을 따르지 않고 월설이 홍경래의 죽음을 목격하는 마지막 장면 끝에 ‘홍경래군의 우렁찬 군가가 들려오는 듯한 환각이 일면서’ 끝나는 이 장면은 일견 비극적이지만 ‘가치 있는 죽음’ 그 자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극적 효과가 두드러진다. 송림전에서 패배한 후 정주성에 갇힌 신세가 된 홍경래가 검무를 추는 장면은 전쟁에 임하는 인간의 절망적 몸부림과 패배를 앞둔 장군의 심정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그야말로 연극적인 장면이다.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했던 혁명은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홍경래는 관군의 총에 맞아 죽게 되지만 희곡 속의 홍경래는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1947년, 남궁만의 꿈은 근대 초기 서북인들이 그려내고자 했던 이상적인 공동체와 맞닿아 있었으며 홍경래가 꿈꾼 혁명을 통해 그 이상적 공동체를 구체화해보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홍경래’는 주로 홍경래 난의 근거지이기도 한 평안도와 서북지역 출신 작가들에 의해 재현되었으며 남궁만 역시 평안도 출신으로 해방기에 ‘홍경래’를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창작했다는 점이다. 남궁만의 <홍경래>는 아직 북한의 체제가 공고화되기 이전 시점에 재현된 역사극으로 1931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현상윤의 <홍경래전>을 참고로 하는 등 역사적 사건의 고증에 힘쓴 흔적이 드러난다. 해방기 역사극은 일제 강점기와는 달리 항쟁과 투쟁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홍경래’가 지닌 혁명가적인 면모 역시 해방기 좌익 계열 연극인들의 욕망을 투사할 수 있는 중요한 대상으로 부각된다. 
남궁만의 <홍경래>는 이순신과 같은 영웅적 인물이 아니라 실패한 혁명가라는 점에서 또 다른 낭만적 이상이 발견되며 
이는 1947년 이후 본격화된 북한문화의 ‘고상한 리얼리즘’의 전신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6.25 전쟁이후 홍경래에 대한 재현이 민중혁명을 위한 영웅성의 과도한 노출로 기울어지면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참조보다 상상적인 허구성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희곡 <홍경래>에는 역사를 해석하는 객관적인 시선과 그를 통한 새국가 건설의 이상을 담지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811년 12월 18일, 평안도 가산 다복동에서 홍경래의 무리가 출정식을 올리고 진격한 후 이듬해 4월 19일 정주성에서 패퇴할 때까지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홍경래의 난’이라고 부른다. 흔히 임꺽정, 전봉준, 이순신 등과 함께 ‘의적’, ‘영웅’, ‘혁명가’ 등으로 묘사되는 홍경래는 난세에 필요한 영웅적 인물로 회자되곤 한다. 그러나 홍경래의 난이 평정된 이후 당시 순조가 내린 교문에는 ‘벌레, 악, 협종(脅從), 흉계, 무뢰배’ 등의 용어를 동원하여 홍경래의 난을 ‘흉역의 난’으로 규정하고 있다. 순조는 이 난의 원인이 흉년이 든 것에 있다고 하면서 홍경래를 비롯한 서북 지역 각층의 인물까지도 무뢰배로 매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홍경래의 난은 조선 후기의 정치경제적 모순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순조 당시의 
홍경래는 역적의 우두머리에 불과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