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바라 워커 '아마조네스의 꿈'

미국 작가 바바라 워커의 원작소설을 토대로 한 <아마조네스의 꿈>은 시공의 블랙홀에 빠져 1995년 서울 근교에 불시착한 원시모계사회의 수나안족 여인인 에테가 생소한 지구문명과 만나면서 진정한 자아에 눈떠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남성중심 사회에 도전하는 여성인류학자, 오로지 가족안에서만 자기정체성을 찾으려 하는 전업주부, 신분상승을 위해 자신의 성까지 상품화하는 방송 리포터 등 다양한 극중인물의 성격대비를 통해 우리 사회가 여성에 가하는 억압과 모순을 형상화 한다.
<아마조네스의 꿈>은 남성성 혹은 여성성이란 이름으로 유포된 기존의 이분법적 성(Gender)개념을 해체하는 것에서 답을 찾는다. 해체는 낯선 타자를 빌려 이뤄지고 있다. 그 타자는 에테라는 이름을 가지고 기원전 3천년 원시모계사회에서 시공의 블랙홀을 타고 온 젊은 여자다. 우연히 95년의 서울 근교에 오게 된 에테는 여성 인류학자 김인화 박사를 만나 현대문명과 하나씩 만난다. 그 과정은, 생명을 낳고 보살피는 모성이 사회윤리로 확대돼 여성의 몸이 존중되며 평등한 공동체사회에 익숙한 에테와 현대산업사회에서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각종 금지와 억압에 길들여 있지만 한편으로 이를 의혹의 눈으로 볼 준비가 돼있는 또다른 여성과의 충돌이다.

사각의 링 같은 억압의 밀림에서 "힘의 거세"를 문화적으로 당연히 채용해 온 오늘의 여성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우리가 원하지 않았으나 이미 거세되어 버린 힘. 힘의 복원"인지도 모른다. 이 과정에서 가장 선결되어야 할 여성 스스로의 과제는 "억압적인 문화에 의해 학습된 여성성, 혹은 남성성"으로부터 자신을 온전히 거리두는 것이며, 그러한 각성과 더불어 힘의 공유. 혹은 억압적인 힘의 해체가 남녀 양성 모두에게 얼마나 공정하고 살기 좋은 삶의 풍토인기를 호소하고자 하는 것이 이 작품의 고통스럽고 낯설은 출발점이다. 여성에게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여자인 우리의 몸을 사랑하는가? 부당하게 수치스러워하거나, "스스로" 대상화하며 정당하지 않은 여성성의 이데올로기에 선험적으로 유린당하고 있지는 않은가? 여성인 우리들의 자의식은 여성이 선택하지 않은 억압적인 남성 문화의 강공에 태어나면서부터 통째로 강간당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다달이 환경으로 피 그리고 산고로 찢기워 나가며 때로 남성적 섹스의 도구적 생식기에 불과한!" 여자의 몸은 무엇이며, 자신의 몸을 즐겁게 하는 연장으로서의 성은 무엇이며, 생식은 남자와 관계 맺는 방식의 실체. 사랑은 또 결혼은 무엇인가? 사회적으로 불리하게 자리매김된 구체적 현실의 장벽은 일단 괄호속에 묶더라도 여성 스스로가 자기자신을 패배 주의적인 삶의 태도에서 "당하는 자로서의 삶의 감성"을 당연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이런 근본적인 질문들과 함께, 도처에서 허약하게 허물어지는 여자의 지병을 에테라는 낯선 여자의 시선을 빌어, 이 연극은 "여성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관객과 더불어 꿈꾸어 보려는 것이다.
기원 전 3천년 전의 원시모계사회라는 "가상적 유토피아"에서 홀연히 20세기말의 서울에 시작한 에테는 "억압된 자의 시선에서 너무도 당연하고 일상적인 현실이 얼마나 낯설고 부당한 것인가?"를 담당하고, 치열하게 드러낸다. 바바라 워커의 <아마조네스의 꿈>에서 빌어온 가장 중요한 상상력은 바로 "억압의 기억이 없는 여자의 순수한 시점"이며 이 연극의 주인공인 에테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여성성"이라는 굴레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여자다.
기존 관념을 의혹의 시선으로 볼 준비가 덜된 관객에게는 이 충돌이 충격으로 확대될 수 있다. 성적 관계에서 주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에테의 모습 때문이다. 스스로 자기 몸을 즐기는 자위행위, 사랑과 성의 대상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넓혀지는 "동성애의 자연스러움", 남성과의 섹스에서는 즐거움과 생식 사이의 선택이 "당연히" 여성으로 옮아간 모습 등이 상상의 단계를 지나 하나의 현실로 전달된다.

각색의 글 - 낯설고 필연적인 에테와의 여행
에테와의 여행은 억압 저편에 존재하는 "자유의 진공캡슐을 탐사하는 과정이었다. 그 진공의 경험이 황홀했던 까닭은 내 생애를 짓누르던 가공할 억압의 인력을 비로소 차낼 수 있었기 때문이지만, 동시에 동반자가 드문 외로운 여정이었기에 고통스럽기만 했다. 이 여행속에서 나는 세계를 느끼는 나의 감성 자체가 근본적으로 왜곡돼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순간의 놀라운 분노와 빛나는 희일 자체가 엄청난 충격이었음을 고백한다. 서른 다섯 해 간 이 세계와의 피할 수 없는 악연을 견뎌 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삶에 대해 한마디로 나의 언어로 말해보지 못한 "말못하는 짐승"이었던 것이다. 여성으로서, 나 자신과 억누르는 세계에 대해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말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본질적이고 통쾌한 반전인가? 감성이 다시 태어나는 어만의 동굴을 거쳐, 나는 많은 자매들이 그들의 여성적 자아를 반란적으로 재탄생 시키는 이 낯설고도 필연적인 여행에 동승해 주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하지만 아직도, 분노와 희열의 두 작두 날 사이에서 의식이 뭉클어지는 비명을 멈출 수 없다. 더 세차게 비명을 내질러야 하는 이유는 아직도 그 분노와 희열의 정당한 몫을 돌려주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뿌리 속의 "말못하며 숨죽여 울어 온 그 여자"에게 언젠가는 가장 정당한 언어로, 그 여자의 분노와 희열을 되돌려주어야 하리라. (전혜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