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 그 단면'
프랑스 낭만주의 운동의 기수인 빅토르 위고는 작품을 통해 작가로서의 사회적 임무를 의식했다. 1862년 출판된 그의 위대한 소설 『레미제라블』은 나폴레옹 이후 프랑스의 사회상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나폴레옹 1세의 몰락에서 한 세대의 반란까지 20년에 걸친, 극적 서스펜스와 속도감 넘치 는 이 소설의 플롯은 근본적으로 도덕성이 강한 탐정이야기다. 인간의 끊임없는 선악투쟁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인생의 성쇠를 극적으로 보여 준다. 있을 법하지 않은 우연한 일이 많고 감정의 폭도 지나치게 과장된 이야기지만 독자의 심금을 울리기에는 충분하다. 런던의 디킨스(1812-70) 이나 모스크바의 도스토예프스키(1821-81) 소설처럼 파리 시민의 서사가 가득하다.
장발장이 주교를 통해 선을 배우는 도입부는 이 작품의 주제를 말해준다. 죄수 장발장은 불행한 과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힘쓰고, 가난과 불명예를 벗고 자비로운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후에 장발장은 타인들에게 엄청난 자비를 이름 없이 베푼다. 돈도 별로 벌지 못하는 마리우스도 작게 나마 못된 테나르디에 가족에게 선을 베푼다. 위고에게 사랑은 낭만적 사랑만이 아니라 참된 용서와 자비심의 인간애를 의미한다. 위고의 표현에 따르면, 장발장에게 주교는 덕을 알게 해주고 코제트는 사랑을 일깨워준 존재이다. 위고는 인간은 사랑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사랑 없는 삶은 인간 이하의 삐뚤어진 삶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의지할 곳 없는 어린 소녀를 보호하면서 사랑에 눈을 뜬 장발장은 선하고 명예로운 사람으로 변한다. 소녀에게 헌신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깨닫고, 소녀가 그를 의지하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가치를 더 알게 된다. 장발장은 코트에게서 부녀관계의 가족애를 깨닫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그녀를 통해 회복한다. 작가는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기독교 정신을 보여준다. 아마도 이 소설에서 독자를 가장 놀라게 하는 인물은 동정심, 자비심, 이해심이 전무한, 이기적이고 무지하고 시야가 좁은 경감 자베르 일 것이다. 감옥에서 태어난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성장한 경감은 장발장과 대조되는 인물이다. 장발장이 원수나 다름없는 자기를 구해준 사실을 자베르 경감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 한다. 법의 굴레, 법 지상주의를 맹종하고 살아온 자베르는 인간의 법 위에 하나님의 법이 있음을 감지한다. 그로서는 전혀 뜻하지 않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 소설은 선악 문제 못지않게 서양문화에 뿌리 깊은 또 다른 이슈인 운명의 주제를 담고 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인생의 신비, "운명의 검은 핏줄”을 알 수 없다고 빅토르 위고는 쓰고 있다.
이는 "우리가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눈 감기 전 임종의 침상에서"라는
소포클레스(4967-406? B.C.)의 『오이디푸스 왕』 마지막 코러스 대사를 연상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