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 '소리의 빛'
<소리의 빛>은 <서편제>의 속편이다. <서편제>에서 분리된 채 등장했던 두 주인공, 즉 의붓남매가 역시 전라도 장흥땅 산골 주막집에서 우연히 상봉하는 것을 그리고 있다. 그 구성은 <서편제>에 비해서 그러므로 퍽 단순하지만, 원한이 한이 되어가는 과정, 그리움이 한이 되어가는 모습이 서럽게 묘사된다. 주막집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어 묻혀 살아가는 장님 여동생을 찾아 우연히 그곳에 나타난 그 오래비는 (그러나 그 우연은 얼마나 오랜 방황 끝에 얻어낸 우연이었던가!) 그녀에게 소리를 청한 다음 자신은 북장단을 들고 밤새도록 소리판을 벌인다. 그리고 난 뒤 둘은 잠자리를 함께 하고 새벽에 다시 헤어진다. 소설 제목 그대로 만질 수 없고 채울 수 없는 소리의 빛처럼. 밤새 반짝이던 빛이지만 오간 데 없이 흘러가 버리고 날아가 버린 소리의 모습만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것은 허무함이지만, 아름다운 허무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이지만 허무한 아름다움이다. <소리의 빛>은 그렇게 소리에게도 빛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소리에 빛이 있다는 것을 시사해 주는 가장 강력한 상징으로서 이 두 편의 작품에 계속 등장하는 것이 바로 <햇덩이>다.
소리를 들은 때마다 사내에겐 눈썹을 불태울 듯이 그의 머리 위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뜨거운 여름 햇덩이가 하나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의 한 숙명의 태양이었다. 이는 먼저 소리와 만나기 전에 만난 햇덩이로서, 사내의 소년시절 그와 함께 다니던 가난, 불운, 요컨대 그가 숙명적으로 느껴야 했던 심리적 억압과 그 분출의 총칭으로 느껴진다.
소년은 여전히 그 무덤가 잔디에서 진종일 계속되는 노랫가락 소리를 들어야 했고, 소리를 들으면서 허기에 지친 잠을 자거나, 소리를 들으면서 그 잠을 다시 깨어야 만 했다. 잠을 자거나 잠을 깨거나 소년의 귓가에선 노랫소리가 떠돌고 있었고, 소년의 머리 위에는 언제나 그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뜨거운 햇덩이가 걸려 있었다.
소리는 얼굴이 없었으되, 소년의 기억 속엔 그 머리 위에 이글거리던 햇덩이보다도 분명한 소리의 얼굴이 있을 수 없었다. 이는 소리와 만난 다음, 보다 구체화된 햇덩이의 모습이다. 그것은 그의 어머니 혼자 사는 그의 어머니가 외간 남자와 만나 정욕을 태우는 장면에서부터, 그 남자가 소리꾼이었다는 사실, 그와 더불어 소리의 생활이 시작되었다는 사실 전체를 함축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경우 햇덩이가 희망의 상징이라든가 하는 긍정적인 표상보다는, 더 이상 억눌러질 수 없는 어떤 한의 표출과 같은 뜨거운 이미지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소리의 빛을 이같은 햇덩이 이미지와 연관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따라서 소리 자체가 지니고 있는 사회심리적인 성격을 설명하고자 했다는 점으로 풀이될 수 있다. 말을 바꾸면, 이들 소설에 그려지고 있는 소리는 도덕적,인습적, 정치적 한의 표출이며 그 승화인 것이다.
이 글은 '서편제'의 속편으로 한을 안고 살아가는 떠돌이의 비극적인 삶을, '한(恨)'의 예술인 판소리 가락 위에 실어 풀어 나간 작품이다. 이 작품의 전편에 일관되고 있는 것은 한의 맺힘과 풀림이다. 예컨대, 여자 아이를 낳다가 어머니가 죽게 되자, 그 아이의 아비인 떠돌이 소리꾼 사내에게 한을 품은 아들이, 의붓아비에게 살의를 느끼다가 도망을 치지만 결국 이복 누이를 찾아 소리를 주고받는 일이라든지, 자신의 눈에 염산을 넣어 눈을 멀게 한 아비를 용서한 딸이 한의 자리를 넓고 깊게 하며 소리를 얻어가는 일 등이 그렇다. 여기서 눈이 멀게 되자 오히려 목청이 살아나게 된다는 내용은 한이 예술적으로 승화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