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라 M. 라구소 '아이네이아스'

아이네이아스는 그리스 신화의 한 인물로 여신 아프로디테와 안키세스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며 트로이 왕족으로 헥토르와는 사촌간이었다. 그리스에 트로이가 함락된 뒤, 이탈리아반도로 넘어가 라비니움을 건설, 고대로마의 건국조상이 되었다.
아이네이아스(Aineias)의 아버지는 앙키세스(Anchises)였다. 앙키세스는 트로이의 세력권에 있던 다르다니아의 왕이었다. 그는 카피스(Kapys)와 테미스테(Themiste)의 아들로 트로이의 명조 트로스(Tros)의 자손이다. 어머니 테미스테가 트로이의 왕 라오메돈의 누이였으니 그와 라오메돈은 조카 사이였다. 앙키세스는 용모가 빼어났다. 하늘에서 지상을 관찰하던 아프로디테가 그의 수려한 외모를 보고 단숨에 마음을 빼앗겼다. 앙키세스가 이다 산에서 가축을 돌보고 있을 때 아프로디테가 그의 앞에 나타나 말했다. 물론 다른 여자의 모습으로 변장한 채였다. “저는 프리기아의 왕 오트레우스(Otreus)의 딸이랍니다. 오래전부터 앙키세스 님을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저의 마음을 받아주세요.” 앙키세스는 뭔가 꺼림칙했다. 여자가 갑자기 나타난 것도 그렇지만 먼저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어색했다. 하지만 여자가 싫지 않았다. 굉장히 예뻤기 때문이다. 예쁘면 정말 모든 것이 용서되는 모양이다. 그는 며칠 동안 그녀와 꿈결같이 달콤한 시간을 보냈다.
올림포스 궁전으로 돌아갈 때가 되자 아프로디테 여신은 앙키세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앙키세스의 얼굴이 금방 일그러졌다. 불길한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여신들과 사랑을 나눈 인간들은 모두 결말이 좋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눈치 채고 아프로디테 여신이 달랬다. “나는 앞으로 아들을 하나 낳을 것이다. 아들은 우선 요정들에게 맡길 것이다. 다섯 살이 되면 너에게 데려다 주겠다. 그때 아이 이름은 아이네이아스(Aineias)로 지어라! 아이 어머니가 누구인지만 발설하지 마라! 그러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아이 어미가 누구냐고 묻거든 그냥 요정이라고만 말해라! 트로이의 운명은 앞으로 그의 어깨에 달려 있다. 그의 후손은 자자손손 끊이지 않을 것이다.”

아이네이아스가 아버지 앙키세스의 품으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대취한 앙키세스가 그만 술김에 사람들에게 아들의 출생의 비밀을 털어놓고 말았다. 그 순간 하늘에서 제우스의 번개가 날아왔다. 그 후 앙키세스는 다리에 번개를 맞은 후유증으로 평생 절름발이로 지냈다. 제우스는 신의 비밀을 함부로 누설한 앙키세스에게 경고하고 싶었던 것이다.
앙키세스는 어린 아들의 교육을 누이의 남편 알카토오스에게 맡겼다. 아이네이아스는 고모부 밑에서 훌륭한 청년으로 자라 아버지를 이어 다르다니아의 왕이 되었다. 그는 트로이 지역에서 헥토르 다음으로 용감했다. 트로이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헥토르의 지휘 아래 많은 전투에 참가했다. 그의 맨 처음 상대는 아킬레우스였다. 그는 이데 산에서 자신의 가축을 약탈하는 아킬레우스를 보고 달려들었지만 아킬레우스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그는 패배하여 근처의 리르네소스로 피신했지만 그곳도 아킬레우스가 쳐들어 와 함락되고 말았다. 제우스가 돕지 않았다면 그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는 그리스 장수 디오메데스(Diomedes)와의 결투에서는 심한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때 아프로디테도 아들을 구하려다 디오메데스의 창에 손이 찔렸다. 그사이 아폴론이 아이네이아스를 구름에 감싸 피신시켰고 아르테미스와 레토 여신이 그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다시 전투에 복귀한 아이네이아스는 그리스군의 장수 크레톤과 오르실로코스를 비롯하여 많은 적군을 죽였다. 파트로클로스(Patroklos)의 시신을 놓고 벌어진 치열한 공방전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디오메데스와의 대결에서는 그를 쓰러뜨리지 못했다. 그는 아폴론의 사주로 다시 아킬레우스와 대결을 벌일 객기도 부려보지만 다시 포세이돈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났다. 아이네이아스는 이처럼 신들의 보호를 받는 축복받은 영웅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신들에게 복종했고, 신들은 경건한 그에게 위대한 운명을 약속했다. 신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트로이인의 운명이 그의 손에 달려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스군이 거짓 철수하자 그들이 해변에 남긴 목마를 놓고 트로이인들 사이에 설전이 벌어졌다. 아이네이아스는 이 사건을 직접 목격하고 본능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버지 앙키세스와 아프로디테 여신도 그에게 빨리 몸을 피신하라고 충고했다. 그는 즉시 짐을 꾸려 가족과 측근들을 데리고 이데(Ide) 산으로 들어갔다. 트로이가 몰락하기 바로 전이었다.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가 화염에 휩싸이자 유민을 이끌고 이데 산을 향했다. 연로하신 아버지는 사자 모피를 어깨에 두른 채 목말을 태웠고, 아들 아스카니오스는 손을 잡고 걸어가게 했다. 그의 아내 크레우사(Kreusa)는 남편의 뒤를 따르다 도중에 남편을 놓치고 목숨을 잃었다. 아이네이아스는 이데 산 기슭 안탄드로스(Antandros) 시에 몇 달간 머문 채 배를 건조하며 항해 준비를 했다. 여름이 되자 마침내 아이네이아스는 유민을 이끌고 출항했다.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곳을 물색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맨 처음 도착한 곳은 트라케(Thrake)였다. 그들은 해안에 제단을 쌓고 신들에게 제물을 바친 다음 땔감을 준비하기 위해 숲 속으로 들어갔다. 나무를 베던 부하들이 갑자기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나무가 피를 흘리며 말을 했다. “아이네이아스여, 왜 나를 괴롭히는가? 나는 프리아모스의 아들 폴리도로스(Polydoros)의 혼령이다. 나는 트라케의 왕이었던 매형에게 억울하게 죽었다. 이곳은 네가 나라를 건설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다. 배반자의 혈족이 다스리는 땅이기 때문이다.” 아이네이아스는 소문으로 들은 그 사실을 기억하고 치를 떨었다. 그는 얼른 짐을 꾸려 도망치듯 트라케를 빠져나왔다.

며칠간 평온한 항해가 계속되다가 멀리서 희미하게 섬이 보였다. 아폴론과 아르테미스가 태어난 델로스(Delos) 섬이었다. 그곳 왕은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통성명을 하고 보니 그는 바로 아버지 앙키세스의 오랜 친구 아니우스(Anius)였다. 아이네이아스는 며칠간 그곳에 머물면서 여독을 풀었다. 떠나기 전 그는 그곳의 아폴론 신전에 가서 어디로 가야 할지 신탁을 물었다. 세발솥 위에 앉아 있던 사제가 신탁을 전했다. “너희 조상의 품으로 가라! 너희들의 옛 어머니를 찾아라! 그곳에서 아이네이아스의 집안은 전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신탁의 내용이 약간 아리송했지만 모두는 환호성을 질렀다. 아이네이아스의 아버지 앙키세스가 신탁이 말한 조상의 품을 크레타로 해석했다. 트로이인의 선조로 알려진 테우크로스(Teukros)가 크레타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즉시 크레타로 가서 집을 짓고 성벽을 쌓았다. 어느 정도 왕궁의 모습이 갖추어지자 열심히 밭을 갈고 씨앗을 뿌렸다. 하지만 갑자기 가뭄이 들어 모든 작물이 햇볕에 타고 말았다. 망연자실하고 있는 그에게 앙키세스가 델로스로 돌아가서 아폴론 신에게 다시 신탁을 물어보자고 제안했다. 떠나기 전날 밤 아이네이아스의 꿈속에 조상신 페나테스(Penates)가 나타나 말했다. “아이네이아스여, 이곳은 델로스에서 아폴론 신이 말한 곳이 아니다. 신께서 말한 곳은 여기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그리스인들은 그곳을 헤스페리아라고 부른다. 너희들의 조상 다르다노스(Dardanos)와 이아시온(Iasion)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아이네이아스는 즉시 아버지 앙키세스를 깨웠다. 앙키세스는 아들의 말을 듣고 카산드라(Kassandra)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녀는 트로이가 몰락하고 앙키세스의 다르다노스족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곳은 헤스페리아(Hesperia), 혹은 이탈리아(Italia)라고 했다. 그 당시 카산드라의 예언은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결국 그녀의 예언은 다 맞지 않았던가?
아침에 아이네이아스의 꿈 이야기를 듣고 모두들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은 들뜬 마음으로 이탈리아를 향해 출발했다. 밤이 되자 무서운 폭풍우가 몰아쳤다. 노련한 조타수 팔리누로스(Palinuros)조차도 방향을 가늠할 수 없었다. 엄청난 파도가 그들을 근처의 해안으로 밀어 붙였다. 그곳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마주 보고 늘어서 있는 스트로파데스(Strophades) 군도 중 한 섬이었다.
섬에는 피네우스(Phineus)의 섬에서 아르고 호의 선원이자 북풍신 보레아스(Boreas)의 아들인 제테스(Zetes)와 칼라이스(Kalais)에게 쫓겨난 괴물 새 하르피이아이(Harpyiai)들이 살고 있었다. 그 괴조(怪鳥)의 얼굴은 처녀지만 몸통은 새의 모습이었다. 항상 굶주려 얼굴은 초췌했고 배설물은 지독한 악취를 풍겼다. 아이네이아스 일행은 그런 사실도 몰랐다. 그들은 주변에 노니는 염소떼와 소떼 중 몇 마리를 잡아 음식을 만들어 막 먹으려 했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쏜살같이 하르피이아이들이 날아와 발톱으로 음식을 낚아채 갔다. 남아 있는 음식도 배설물을 쏟아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동굴로 숨어 식사를 해도 소용없었다. 마침내 모두들 칼을 들고 위협하자 그들 중 켈라이노(Kelaino)라는 하르피이아이 한 마리가 높은 바위 위에 앉더니 말했다. “트로이의 유민들이여, 남의 섬에 와서 마음대로 짐승을 잡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우리를 섬에서 쫓아내려 하는구나. 이곳은 너희들이 있을 곳이 아니다. 아폴론 신의 전갈이다. 당장 이탈리아로 가라. 너희들은 그곳에 도착하면 너무나 배가 고파 식탁마저도 먹어치우게 될 것이다.”
앙키세스가 하늘을 우러러 신들의 가호를 빌며 출항을 명령했다. 그리스 본토 해안을 따라 계속 항해하던 선단은 파이아케스인들의 나라를 거쳐 카오니아(Chaonia) 포구로 들어갔다. 그곳에 상륙한 일행은 곧장 부트로톤(Buthroton) 시로 향했다. 그곳은 프리아모스의 아들이자 트로이의 장수이자 예언가였던 헬레노스(Helenos)가 통치하고 있었다. 헬레노스는 트로이 전쟁 때 그리스에 협력한 공으로 목숨을 건져 그곳에 정착했다. 감격의 해후를 한 뒤 헬레노스가 그들을 아폴론 신전으로 안내했다. 앙키세스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신탁을 묻자 사제가 말했다.
“앙키세스여, 자세하게 말하지는 않겠소. 그건 헤라 여신이 금지했기 때문이오. 하지만 아무 걱정 마시오. 그대들은 신의 뜻에 따라 항해를 하고 있는 것이오. 그렇다고 당장 이탈리아에 가게 된다는 것은 아니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소. 지하세계도 가야 하고 키르케가 사는 섬인 아이아이에 옆도 통과해야 하오. 모든 역경을 이기고 이탈리아에 도착하거든 우선 강을 찾으시오. 그러면 강가 떡갈나무 밑에 거대한 흰 암퇘지가 서른 마리의 새끼와 함께 누워 있는 곳이 있을 것이오. 바로 그곳이 그대들이 터전으로 삼을 곳이오.”
그들은 신탁대로 이탈리아 남부 해안을 따라 가다가 아이트나(Aitna) 산이 있는 시칠리아 남부의 조그만 포구에 기항했다. 바로 옆에서는 아이트나 산이 간헐적으로 굉음을 내며 연기를 뿜고 있었다. 산 밑에는 기간테스 엥켈라도스(Enkelados)가 제우스에게 대들다가 아테나에 잡혀 갇혀 있었다. 그가 고통에 못 이겨 돌아누울 때마다 굉음이 생겨났다. 그들이 상륙한 장소는 키클로페스들의 주거지로 오디세우스가 폴리페모스(Polyphemos)를 곯려준 곳이었다. 아침이 되자 갑자기 근처 숲속에서 거지 행색을 한 사람이 하나 걸어 나왔다. 그는 트로이의 깃발과 무구를 보더니 멈칫하다가 이내 그들에게로 달려와 엎드렸다. 그는 구슬프게 흐느끼면서 자기를 제발 어디로든지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다. 앙키세스가 오른손을 내밀어 그를 부축하며 누구인지 묻자 그가 대답했다.
“제 이름은 아다마스투스(Adamastus)의 아들 아카이메니데스(Achaimenides)입니다. 이타케 출신으로 오디세우스를 따라 트로이 전에 참전했습니다. 저는 귀향하다가 오디세우스와 함께 이 섬에 왔다가 폴리페모스의 동굴에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정말 끔찍한 일을 경험했습니다. 눈앞에서 폴리페모스가 동료들을 벽에 메쳐 잡아먹곤 했으니까요. 그런데 그만 실수로 동료들이 폴리페모스를 피해 달아나다가 경황 중에 저를 남겨두고 떠나버렸습니다. 저는 벌써 세달 동안이나 키클로페스들을 피해 가슴 졸이며 살아왔습니다.”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나타난다고 했던가.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폴리페모스가 지팡이를 짚고 양떼를 몰고 그들과 가까운 해변으로 다가왔다. 그는 물속으로 들어가더니 눈에서 아직도 흘러내리는 피를 바닷물로 씻었다. 공포에 질린 아이네이아스 일행은 조심스럽게 아카이메니데스를 배에 태우고 재빨리 노를 저었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을 감지한 폴리페모스가 그들을 향해 누구냐고 소리를 질렀다. 그의 고함 소리를 듣고 폴리페모스의 동료들이 모여들었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들은 시칠리아 섬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드레파논(Drepanon) 항구로 들어갔다. 그곳에 상륙하자마자 헬레노스와 무서운 괴물새 켈라이노도 예언하지 못했던 슬픈 일이 일어났다. 아이네이아스의 아버지 앙키세스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은 앙키세스를 정성스레 장사지낸 다음 그곳을 출발하여 북쪽을 향했다.
헤라 여신이 하늘에서 그들을 발견하고 바람의 지배자 아이올로스(Aiolos)에게 트로이 선단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여신은 아직도 아프로디테 여신과 트로이인들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질투의 화신 헤라로서는 당연히 그럴 만했다. 트로이인 파리스가 헤라를 무시하고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황금사과를 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트로이인들은 제우스와 그의 연인 엘렉트라(Elektra)의 아들 다르다노스(Dardanos)의 후손이었다. 아이올로스는 즉시 헤라의 명령을 수행했다. 남풍과 동풍이 심하게 불기 시작하고 트로이의 선단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포세이돈이 갑자기 폭풍우가 이는 것을 보고 남풍과 북풍을 불러 꾸짖었다. “당장 바다에서 물러가라! 바다의 지배권은 원래 내 것이다. 너희 주인 아이올로스에게 이 말을 꼭 전해라!”
곧 다시 파도가 잔잔해졌지만 이미 아이네이아스의 선단은 뿔뿔이 흩어진 후였다. 아이네이아스는 간신히 일곱 척을 수습하여 가까운 해안에 상륙했다. 그들이 파도에 휩쓸려 간 곳은 아프리카 북부 해안이었다. 아이네이아스는 우선 숲에 들어가 사슴을 잡아와 구워 먹으며 지친 부하들을 달랬다. 식사가 끝나자 그는 절친한 친구 아카스테(Achaste)와 섬을 정찰하다가 왕궁 하나를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디도(Dido) 여왕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디도는 페니키아 티로스(Tyros)의 왕 무토(Mutto)의 딸이었다. 디도가 재력가이자 숙부인 시카이우스(Sychaius)와 결혼하자 동생 피그말리온(Pygmalin)은 재산이 탐이 나 매형을 살해했다. 디도는 잔인한 동생에게 절망했다. 더 이상 조국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뜻을 같이 하는 귀족들과 함께 남편의 재산을 모두 챙겨 티로스를 탈출했다. 그녀는 이곳에 카르타고(Karthago)라는 도시를 건설하고 있었다. 아이네이아스가 그녀에게 신분을 밝히고 그간의 모험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이미 트로이 전쟁과 아이네이아스의 활약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호감을 보이며 모든 편의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걸 보고 아프로디테 여신과 헤라 여신이 이들을 맺어주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그들은 속셈이 달랐다. 아프로디테는 아이네이아스의 신변 안전을 위해서였고, 헤라는 얄미운 아이네이아스를 아예 그곳에 눌러앉게 할 심산이었다. 마침 아이네이아스가 전령을 보내 아들 아스카니오스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에로스가 어머니 아프로디테의 부탁을 받고 아스카니오스 대신 그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아이네이아스는 아들이 오자 기뻐하며 그를 안고 얼렀다. 그걸 보고 디도도 아이를 안아보고 싶어 했다. 디도가 아이네이아스로부터 아스카니오스를 건네받는 순간 에로스는 재빨리 그녀의 심장에 황금화살로 상처를 냈다. 그때부터 아이네이아스에 대한 디도의 마음은 손님에 대한 호의에서 갑자기 불타는 사랑으로 바뀌었다. 그날부터 둘 사이가 깊어갔다. 아이네이아스는 더 이상 출항할 생각을 하지 않고 아예 그곳에 눌러 앉을 태세였다. 소문의 여신 파마(Fama)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녀는 재빨리 근처 누미디아(Numidia)족 이아르바스에게 날아가 염장을 질렀다. 디도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었던 이아르바스(Iarbas)는 질투심에 불타 분노했다. 그는 자신의 수호신 제우스에게 기도하며 원망했다. 제우스는 그의 분노도 달래주고 싶었지만 본분을 잃고 있는 아이네이아스가 더 안타까웠다. 그는 아들 헤르메스를 불러 말했다. “아이네이아스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가 그를 전쟁터에서 두 번이나 구해 주고 폭풍우에서도 몇 번 구해 준 것은 여기서 눌러앉아 살라는 뜻이 아니었다. 그는 나를 위해 로마를 건설해야 한다. 그에게 당장 배를 타고 떠나라 해라!”
헤르메스는 날개 달린 신발을 신고 잽싸게 아이네이아스에게 날아갔다. 아이네이아스는 이제 완전히 카르타고인이 된 것 같았다. 그는 디도가 만들어준 옷을 입고 궁전 건축을 감독하고 있었다. 헤르메스는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게 그에게 다가가 귀에 대고 제우스의 말을 전했다. 아이네이아스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는 당장 믿을 만한 부하들을 불러 은밀히 출항 준비를 하라고 시킨 다음 디도에게 알리지도 않고 출발했다. 디도는 아이네이아스가 말없이 떠나버리자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며칠 동안 괴로워하던 그녀는 동생 안나를 불러 궁정 마당에 장작을 쌓으라고 지시했다. 아이네이아스가 남겨둔 무기나 옷 그리고 함께 쓰던 침대도 올려 태우라고 했다. 장작에 불이 활활 타오르자 디도는 갑자기 화염에 싸인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정말 눈 깜짝 할 사이였다. 동생 안나가 언니를 잡으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이네이아스 일행은 시칠리아에 다시 도착했다. 이번에는 아이게스테스(Aigestes) 왕이 다스리는 지역이었다. 그는 아이네이아스의 먼 친척뻘이었다. 트로이 귀족의 딸이었던 아이게스타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경위는 이렇다. 트로이의 왕 라오메돈이 성벽을 쌓아준 아폴론과 포세이돈에게 약속한 임금을 주지 않은 적이 있었다. 화가 난 포세이돈은 바다의 괴물로, 아폴론은 역병을 일으켜 트로이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라오메돈이 재앙에서 벗어날 방도를 묻자, 신탁은 귀족 집안의 처녀를 바다의 괴물에게 재물로 바치라고 했다. 많은 귀족들이 그 말을 듣고 딸을 구하려고 외국으로 보냈다. 그때 아이게스타의 아버지 히포테스도 어떤 상인에게 딸을 부탁했고, 상인은 그녀를 시칠리아로 데려왔다. 그때 아이게스타는 시칠리아의 강의 신 크리미소스(Krimisos)의 눈에 들어 그의 아들 아이게스테스를 낳았던 것이다. 아이네이아스는 이곳에서 아이게스테스 왕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그는 마침 기일이 된 아버지를 위해 추모 경기를 열기도 했다. 그런데 트로이의 여인들이 갑자기 선단에 불을 질렀다. 7년 동안의 항해에 지친 그들을 헤라 여신이 부추겼기 때문이다. 여인들은 배가 없으면 아이네이아스가 그곳에 정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배는 네 척만 불에 탔다. 제우스가 때마침 비를 내려주었기 때문이다. 상심해 있는 아이네이아스에게 그날 밤 죽은 앙키세스가 나타나 제우스의 명령을 전했다. “아이네이아스야, 네 백성들 가운데 가장 용감한 자들만 골라 이탈리아로 데려가라! 너는 그곳 라티움(Latium) 땅에서 사나운 라티니(Latini) 부족과 전쟁을 치러야 될 것이다. 하지만 너는 그 전에 지하 세계를 방문해서 나를 만나야 한다. 아폴론 신의 사제 시빌레(Sibylle) 여신이 너의 미래를 예언해 주고 지하 세계로 안내할 것이다. 그녀는 쿠마이(Cumae) 해변의 동굴에 살고 있다.”
아이네이아스는 아버지의 말대로 노약자들과 항해에 소극적인 자들은 시칠리아에 남겨두고 원하는 자들만 데리고 이탈리아를 향해 출발했다. 남은 자들은 그곳에 아케스타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그들이 출항하고 얼마 되지 않아 키잡이 팔리누로스(Palinuros)에게 잠의 신이 조용히 다가왔다. 잠의 신은 팔리누로스에게 배는 평온한 바다에 맡기고 눈을 좀 붙이라고 꼬드겼다. 팔리누로스는 펄쩍 뛰며 거부했지만 잠의 신이 살랑살랑 졸음을 불어넣자 마침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잠의 신은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구부려 그를 자리에서 바다 속으로 슬그머니 밀어버렸다. 그는 키의 일부를 손에 꽉 쥔 채 비명을 지르며 바다로 떨어졌다. 키잡이가 없어도 배는 포세이돈의 도움으로 순항하여 마침내 이탈리아 해안 쿠마이(Cumae)에 도착했다. 동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이곳저곳을 쏘다니는 사이에 아이네이아스는 시빌레 여신이 사는 동굴을 찾았다. 시빌레는 신탁을 묻는 아이네이아스에게 앞으로 이탈리아에서 일어날 일들을 수수께끼 같은 말로 늘어놓았다. 그는 꿈속에 나타난 아버지가 말한 대로 그녀에게 지하 세계로 안내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우선 숲에 가서 지하 세계의 출입증인 황금가지를 꺾어오라고 시켰다. 고대에 겨우살이는 겨울에도 황금빛으로 빛나 황금가지로 불렸고 신성한 나무로 여겼다. 다행히 아이네이아스는 산속에서 참나무 가지에 걸려 있는 그것을 손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지하 세계의 강 스틱스 강가에는 장례를 치르지 못한 영혼들이 방황하고 있었다. 뱃사공 카론이 그들을 강 저편으로 건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장례를 치르지 않아 배 삯을 치를 노잣돈이 없었다. 그들 중에는 키잡이 팔리누로스도 보였다. 아이네이아스는 그에게 돌아가면 즉시 장례를 치러주겠다고 약속했다. 시빌레가 황금가지를 보이자 카론(Charon)은 아무 말 없이 그녀와 아이네이아스를 배에 태워 스틱스 강을 건네주었다. 지하 세계에서 아이네이아스는 수많은 혼령들을 보았다. 디도(Dido)의 영혼도 만났다. 그는 그녀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그녀는 그를 보더니 갑자기 다른 쪽으로 홱 방향을 돌려 버렸다. 아직도 그에게 분이 안 풀린 것 같았다. 그들은 복수의 여신 세 자매인 에리니에스(Erynies) 중 하나인 티시포네(Tisiphone), 미노스(Minos), 라다만티스(Rhadamanthys)가 사자들을 심판하고 벌을 주는 타르타로스 입구를 거쳐 엘리시온(Elysion)의 뜰로 향했다. 엘리시온은 선택받은 선한 영혼들만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아이네이아스의 아버지 앙키세스도 죽어 그 안에 살고 있었다. 앙키세스는 아들을 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망각의 강 레테가 보이는 곳으로 데려갔다. 레테 강변에는 지상에서 죄의 경중에 따라 죗값을 치른 영혼들과 선한 행동에 따라 보상을 받은 영혼들이 순서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그들은 지상으로 다시 태어나기 전 레테(Lethe) 강물로 몸을 씻어 모든 기억을 씻어내는 참이었다. 그는 그들 중 한 영혼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 아들아, 잘 들어라! 바로 저 젊은이가 너의 막내아들로 태어날 실비우스이다. 그는 알바 롱가라는 왕조를 건설하여 후대 왕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그 옆이 각각 2대, 8대, 14대 왕인 아이네이아스 실비우스(Aineias Silvius), 카피스(Capys), 프로카스(Prochas)이고, 그 다음이 15대 왕 누미토르(Numitor)이다. 또 저 젊은이가 바로 로마를 건설하게 될 누미토르의 외손자 로물루스(Romulus)이다. 그의 통치권은 온 대지에 미치고 그 기백은 하늘을 찌를 것이다. 로마는 일곱 언덕을 하나의 성으로 둘러싼 철옹성이 될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로물루스 이후의 로마 왕들을 하나씩 열거하며 미래에 펼쳐질 찬란한 로마 역사를 자랑스럽게 열거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머지않아 아들이 치르게 될 라우렌툼(Laurentum) 왕국과 루툴리(Rutuli) 왕국과의 전쟁을 어떻게 하면 승리로 이끌 수 있을 것인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말을 마치자 그는 그들에게 지상으로 나가는 출구를 알려주었다.
동료들에게 돌아온 아이네이아스는 다시 항해를 시작하여 이탈리아 동부 해안가를 올라가다가 키르케가 사는 아이아이에(Aiaie) 섬 옆을 통과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강 티베리스(Tiberis)의 하구가 바다로 물줄기를 뿜어대는 것을 발견하고 그 안으로 배를 몰았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 강가에 정박하여 기슭에 오른 아이네이아스 일행은 시장기가 돌아 음식을 차렸다. 그들은 마침 접시가 없어서 넓적한 밀가루 케이크에 음식을 올려놓고 먹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가시지 않아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케이크를 뜯어먹고 있었다. 그걸 보고 아이네이아스의 아들 아스카니오스가 “어른들이 식탁을 먹고 있다!”며 깔깔댔다. 그 말을 듣자마자 아이네이아스는 괴조 하르피이아이 중의 하나였던 켈라이노의 신탁을 떠올리며 모두에게 이곳이 약속의 땅임을 알렸다. 이곳 부족 중 가장 강한 것은 늙은 라티누스(Latinus)가 다스리던 라티니족의 라우렌툼이었다. 라티누스는 크로노스의 손자이자 숲의 신 파우누스(Faunus)의 아들이었다. 그 옆에는 젊은 혈기를 자랑하는 투르누스(Turnus)가 루툴리(Rutuli)족을 다스리고 있었다. 투르누스는 페르세우스의 아내 다나에의 후손이었다. 아들 페르세스와 함께 모험을 하던 다나에는 이곳에 아르데아(Ardea)라는 국가를 건설했었다. 투르누스는 오래전부터 라티누스의 딸 라비니아(Lavinia)에 청혼을 했었다. 라티누스의 아내 아마타(Amata)는 사윗감에게 무척 만족했지만 라티누스는 달랐다. 그는 신탁을 통해 자신의 딸은 외지인과 결혼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마침 아이네이아스가 사절단을 보내오자 그를 만나 사위로 삼으려 결심했다. 그는 신이 그에게 신탁에서 말한 외지인을 사위로 보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티누스 왕이 아이네이아스를 만나기 전에 헤라 여신이 개입했다. 그녀는 아이네이아스의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녀는 지하 세계에서 복수의 여신 세 자매인 에리니에스 중 하나인 알렉토(Alekto)를 불러와 아마타와 투르누스의 마음에 외지인에 대한 적개심을 품도록 부추겼다. 마침내 트로이인과 라티니족 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라티누스는 분쟁을 막아보려고 전쟁을 선포하는 야누스(Janus) 신전의 문을 열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헤라 여신이 몸소 야누스 신전의 문을 밀어제쳤다.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투르누스의 연합군 장수들은 실로 막강했다. 먼저 메젠티우스(Mezentius)로 그는 신을 경멸할 정도였다. 그는 한때 에트루리아(Etruria)의 왕이었으나 국민들에게 쫓겨나 투르누스에게 망명객으로 의지하고 있었다. 헤라클레스의 아들 아벤티누스(Aventinus)도 투르누스 편을 들었다. 그는 방패에 아버지의 문장인 일백 마리의 뱀에 감긴 히드라(Hydra)를 그려 넣고 다녔다. 헤라클레스는 몸통이 셋인 괴물 게리오네우스(Geryoneus)를 죽이고 소떼를 데려오다가 이곳에서 쉬면서 여사제와 사랑을 나누어 아벤티누스를 낳았다. 그는 아버지 헤라클레스가 물려준 네메아의 사자 가죽을 쓰고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궁전에 나타났다. 아르고스의 왕 암피아라오스(Ampiaraos)의 쌍둥이 아들 카틸루스(Catillus)와 코라스(Cora)도 합류했다. 사비니의 클라우수스(Clausus)도 대군을 이끌고 왔다.
이밖에도 사방에서 군소 국가들이 투르누스군에 합류했다. 그중에는 볼스키(Volsci)족의 여전사 카밀라(Callila)도 있었다. 그녀의 주력부대는 기병대였다. 그녀는 여자였지만 물레질이나 설거지에는 소질이 없었고 전투를 즐겼고 바람보다도 빨랐다. 하지만 투르누스는 그리스 출신의 디오메데스(Diomedes)의 도움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디오메데스는 트로이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그리스로 귀환하지만 아내의 배신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이탈리아로 피신했었다. 그는 자신이 세운 새 도시 아르기리파(Argyripa)에 많은 어려움이 있어서 군대를 파견할 수 없었다. 투르누스의 강력한 군대는 트로이인들을 경악에 떨게 했다. 근심에 쌓인 아이네이아스의 꿈에 티베리스 강의 신 티베리누스(Tiberinus)가 나타났다. 그는 아이네이아스의 용기를 북돋우면서 말했다.
“아이네이아스여, 낙담하지 말거라. 너의 부족은 절대로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내 그 증표를 보여주겠다. 너는 곧 강가에서 30마리의 하얀 새끼돼지를 거느리고 누워 있는 어미 돼지를 발견할 것이다. 그곳이 바로 30년 뒤 건설될 로마의 모체가 될 알바 롱가가 세워질 부지이다. 내가 저들과 대적할 수 있는 좋은 방도도 말해 주겠다. 여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아르카디아의 후손들을 다스리는 에우안드로스 왕의 나라가 있다. 아침이 되면 곧바로 헤라 여신에게 아까 내가 말한 돼지를 찾아 제물을 바치고 노여움을 풀어준 다음 그를 찾아가 동맹을 맺어라. 그는 기꺼이 너의 편이 되어줄 것이다.”
아침이 되어 떠날 채비를 하는데 근처 강가에 놀랍게도 30마리의 새끼를 거느린 어미 돼지 한 마리가 눈처럼 하얀 빛을 발하며 누워 있었다. 아이네이아스는 강의 신이 시킨 대로 그들을 잡아 헤라 여신에게 바치고 에우안드로스(Euandros) 왕을 찾아갔다. 왕은 그가 도움을 요청하자 흔쾌하게 수락했다. 하지만 그는 너무 노쇠했기 때문에 직접 출병하는 대신 400명의 기병대와 함께 자신의 아들 팔라스(Pallas)를 딸려 보냈다. 그사이 아프로디테는 남편 헤파이스토스에게 가서 아들이 쓸 방패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헤파이스토스는 만사를 제쳐두고 아이네이아스의 방패를 만들었다. 방패는 그 무엇도 뚫을 수 없을 정도로 견고했다. 겉에는 어미 늑대의 젖을 쌍둥이가 빨고 있는 장면을 비롯하여 로마의 미래를 보여주는 그림으로 빼곡하게 들어찼지만 아이네이아스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네이아스는 독재자 메젠티우스를 쫓아낸 에트루리아인으로부터도 원조를 약속받았다. 아이네이아스가 진영에 없는 사이 투르누스가 먼저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트로이군은 상대하지 않고 성안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투르누스는 방어가 약한 지점을 찾다가 아이네이아스의 선단이 강가에 교묘하게 숨겨 있는 것을 발견하고 배에 불을 질렀다. 바로 그 순간 제우스가 천둥과 번개를 치며 배를 재빨리 바다의 요정으로 변신시켰다. 제우스가 트로이 선단을 지켜주라는 어머니 레아(Rhea) 여신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었다. 투르누스 군사들은 그 기적에 놀라 더 이상 공격은 하지 못하고 포위만 하고 있었다. 그사이 에우리알로스(Euryalos)와 니소스(Nisos)가 포위망을 뚫고 아이네이아스에게 위기를 알리겠다고 나섰다가 모두 장렬하게 전사했다. 니소스는 그대로 달아나면 살아날 수 있었는데도 죽음을 무릅쓰고 포로가 된 절친 에우리알로스를 구하려고 은신처에서 나와 적과 일전을 벌이다 최후를 맞이했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은 참다운 우정의 상징이 되었다. 마침내 아이네이아스가 지원군을 배에 가득 실고 돌아왔다. 이어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접전이 벌어지고 투르누스는 에우안드로스의 아들 팔라스를 죽여 얻은 전리품인 검대(劍帶)를 무구에 차고 다녔다. 아이네이아스는 메젠티우스와 그의 아들 라우수스(Lausus)를 죽였다. 시신들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잠시 휴전을 선포했다. 이때 아이네이아스가 투르누스와의 일대일 대결을 제안했다. 자기가 지면 깨끗이 이곳에서 물러나고, 이기면 평화 협정을 체결하고 같이 살게 해달라는 것이다. 투르누스 진영은 아이네이아스의 제안에 의견이 분열되지만 다시 헤라의 간계로 휴전이 깨지고 싸움이 시작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일치단결된 모습을 보였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면서 트루누스 진영의 여전사 카밀라도 에트루리아의 왕 타르코(Tarcho)와 싸우다 전사하고, 그녀의 군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트로이인 측의 아이네이아스도 한때 심하게 부상당하지만 어머니 아프로디테 여신의 도움으로 곧 회복되었다. 그러자 다시 사기가 최고조로 오른 트로이인들은 마침내 라티니족의 도시 라우렌툼을 점령했다. 그 와중에 아마타(Amata)는 사윗감 투르누스가 전사했다고 지레 짐작을 하고 자살했다. 하지만 아직 살아 있었던 투르누스가 이번에는 자신이 아이네이아스에게 일대일 결투를 제안했다. 이어 두 사람의 결투가 벌어지고 투르누스가 심하게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아이네이아스는 처음에는 늙으신 아버지 다우누스(Daunus)를 생각해서 가족 품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투르누스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어깨에서 반짝이는 전사한 에우안드로스의 아들 팔라스의 검대를 보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갑자기 투르누스에게 달려들어 그의 가슴을 칼로 찔러 죽이고 전쟁을 종결했다.
아이네이아스는 라티니족과 평화 협정을 체결하고 공주 라비니아와 결혼했다. 이때 트로이인들은 자신들의 이름과 언어를 포기하고, 라티니족은 이방인의 조상신 페나테스를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다. 앙키세스의 예언대로 아이네이아스와 크레우사의 아들 아스카니오스는 알바 롱가(Alba Longa)를 건설하여 30년 동안 통치하다가 아이네이아스와 라비니아의 아들 실비우스에게 넘겨주었다. 알바 롱가는 그 후 아이네이아스의 후손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설할 때까지 300년 동안 라티니족의 수도가 된다.
아이네이아스의 아들 아스카니오스는 이울루스(Iulus)라는 로마식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카이사르와 그의 양자 아우구스투스의 가문 이름 율리아는 그에게서 유래한다. 그래서 아스카니오스는 자연스럽게 카이사르 집안의 시조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