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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니엘 호손 '주홍 글씨'

clint 2023. 2. 20. 17:30

 

회환과 비애의 청교도적 열망과 구원을 다룬 '주홍 글씨'는 가장 공포스럽고 저주스러운 형태로 죄와 슬픔이 재현된 작품이다. 비록 호돈은 이 작품에 '하나의 로맨스'라는 부제를 달아 놓았지만, 영국의 작가인 로렌스가 말했듯이 '주홍글씨'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로맨스는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우화, 죄와 구원의 의미를 그리고 있는 인간의 연약함과 슬픔에 관한 이야기이다. '주홍 글씨'는 인간의 본성 중의 하나인 죄악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들인 네 사람 헤트너, 딤즈데일, 칠링워드, 펄의 삶을 어떻게 구원과 파멸로 이끄는가 하는 것을 냉혹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주홍 글씨'는 충동적이며 정열적인 여인 헤스터 프린이 간통죄로 고발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가장 신성하고 순수해야 할 신세계에서 죄를 범했다는 청교도 사회의 율법에 따라 죄의 상징인 주홍 글씨 'A'를 가슴에 달고 헤스터는 장터의 사형대 위에 서있다. 그 마법의 글자는 불완전의 상징. 죄악의 표적으로써 헤스터를 어두운 고립의 세계로 영원히 격리, 추방하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헤스터는 죄악의 씨앗인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자신의 타락과 죄악이 햇빛 아래 폭로되는 것을 당당하게 견디면서 가슴의 주홍글씨를 떳떳하게 드러내 놓고 서있는 것이다. 그녀는 주홍 글씨에 의해 영원히 일상적인 평안의 세계, 현실적인 선의 세계로부터 추방되어 고립되었지만, 오히려 자신의 행위를 용기있게 인정하고 자신으로 인해 야기된 모든 비극을 꿋꿋이 감수했던 것이다. 반면 숨은 죄인인 딤즈데일은 겉으로는 청교도 사회의 성스러운 목사요, 정신적 지도자로서 존경을 받지만, 내적으로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못하고 깊은 죄의식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처절한 고통 속에서 보내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헤스터와 펄과 자신과의 지극히 당연한 유대관계를 부정하고 목사로서의 임무 수행을 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소명이라고 생각하는 위선에 빠져 있다. 그러면서도 은밀한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으로 자신을 점점 어둠의 골짜기로 몰아넣는 것이다. 이처럼 딤즈데일이 스스로의 죄를 고백하지 못하고 죄의식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것은 그가 칠링워드나 다른 청교도 시민들처럼 대서양을 건너와 청교도 공동체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 이상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런 인간이 되지 못하고 죄인과 성인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그리고 그의 어두운 내면은 육체적인 병을 유발하게 된다. 한편 이 작품의 또 다른 죄인인 칠링워드는 아내인 헤스터의 부정을 알고서 무서운 복수를 결심한다. 늙고 기형적인 모습을 한 그는, 자기의 신분을 감추고 냉혹한 의미의 칠링워드라는 이름으로 사악한 정열에 사로잡혀 불모의 고립 속으로 빠져든다. 그는 펄의 아버지가 발견되지 않는 한, 지상의 부정은 제거되지 않는다는 그릇된 신념을 가짐으로써 최면술사이며, 과학자이고, 유능한 의사였던 그는 스스로 고통을 받으며 성격이 왜곡된다. 무서운 악마로 변신한 칠링워드는 마치 악마의 마법에 끌리듯 성스러운 목사 딤즈데일에게 접근해 마침내 그가 바로 자신이 찾던 펄의 아버지요, 복수의 대상임을 알아낸다. 그리고 딤즈데일이 독에 감염되어 죽을 때까지 집요하고도 치밀하게 딤즈데일의 영혼의 비밀을 백일하에 드러내어 복수의 쾌재를 부르고자 애쓴다. 이렇든 칠링워드는 지상에서의 완전한 세계의 실현을 위해 인간 마음의 신성함을 짓밟는 용서받지 못한 죄악을 저지른다. 그의 존재의 의미는 어디까지나 딤즈데일에게 달려 있으며, 딤즈데일의 죽음은 바로 그의 존재 의미의 상실이며 마지막인 것이다. 호돈은 그에게 일말의 동정도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칠링워드는 지적 교만에 의해 인간성을 상실하고, 인간 마음의 신성함을 파괴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육욕과 위선의 죄를 지은 딤즈데일에게는 인간으로서의 연민과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헤스터로부터 칠링워드에 대해서 듣고, 딤즈데일은 새로운 자유를 찾아 보스턴을 탈출할 것을 약속하지만, 결국 그는 광장의 설교대에서 마지막 설교를 하던 중 죽고 만다. 칠링워드는 반인간적 심성으로 딤즈데일의 영혼을 분해하다가 풀잎처럼 시들게 되지만, 딤즈데일은 불길 같은 설교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죄의 고백과 함께 치욕적이지만 떳떳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칠링워드로부터 그의 영혼을 구한 것이다.

이처럼 주홍글씨 'A'를 중심으로 상상과 현실의 세계를 넘나들며 펼쳐진 인물들 간의 극적인 심리적 갈등과 고뇌는 인간과 삶에 대한 호돈의 문학적 깊이가 얼마나 첨예했던가를 보여준다. 호돈은 A자 하나로 딤즈데일을 깊은 고뇌와 뉘우침으로 어둠 속을 헤매게 하고, 칠링워드를 복수의 화신, 검은 악마로 변신케 하고, 헤스터를 치욕과 고립의 세계에서 방황케 하였으며, 펄을 죄악과 구원의 이중적인 불꽃으로 형상화했던 것이다.

 

 

'주홍 글씨' 1640년대의 보스턴 식민지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소재로 하여 청교도가 지배하는 신정일치의 식민지사회에서 억압되는 인간의 모습을 19세기의 시대정신을 통해 비판하고 있다. 따라서 '주홍글씨'는 청교도의 엄격한 종교 밑에서 완벽해야 할 신세계가 초기부터 죄가 범해졌음을 나타내면서 죄의 과정은 서술하지 않고 죄의 대가만으로 소설을 이끌어 간다. 호돈은 유토피아적인 신세계를 건설하려는 청교도들의 불완전성을 파헤치고 문화가 신앙을 경직시켜 버려 인간의 본성을 잃어버렸음을 나타내었다. 작가는 칠링워드의 타락과 죽음의 파멸을 통해 에덴동산과 같은 완전함을 기대하는 이상주의의 꿈이 얼마나 위험하고 실현 불가능한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이에 반해 헤스터와 딤즈데일은 처음부터 죄를 범한 불완전한 인간으로 묘사하면서, 이들을 통해 죄를 범한 인간, 즉 불완전한 인간이 바로 참된 미국인의 상이라는 것을 암시하며 동시에 기계문명 속에서 '정원의 신화'를 꿈꾸고 있는 작가와 같은 시대의 미국인들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헤스터 프린이 항상 가슴에다 달아야 했던 주홍 글씨는 그녀가 불완전한 죄인이라는 것을 상징하지만 그녀가 인간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그녀가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불완전했으므로 인간적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의 결말에 가서 유럽에서 돌아온 헤스터가 가슴에 A자를 달고 여생을 보냈다는 것은, 죄를 짓는다는 것은 가장 인간적인 일이며, 참다운 미국인은 완전한 낙원에 살 수 있는 이상적인 인간이 될 수 없다는 호돈의 테마를 재확인한 것이다. 따라서 주홍글씨를 다는 것이 바로 참다운 미국인이 되는 증명이라면 헤스터가 달았던 A자는 다름 아닌 '아메리카'의 머리글자라고 해도 터무니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처럼 '주홍 글씨'는 청교도사회의 도덕에 저항하고 있는 인간의 본능을 나타내면서 청교도 사회의 화석화된 신앙을 폭로한 고발문이며, 나아가 19세기 중반에 팽배하였던 미국적 열망과 낙관주의를 상징적으로 질타한 비판서로써 그 문학적,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할 것이다.

 

롤랑 조페 감독의 1995년작. 데미 무어 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