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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섭 '그래서 나는 조선을 버렸다'

clint 2023. 2. 19. 13:24

 

"아이의 겨드랑에는 날개가 있었다. 아이의 부모가 그 비범함을 두려워해 죽이려 하자 아이는 유언으로 콩과 팥 닷 섬을 함께 묻어 달라고 청했다. 시간이 지난 후 관군이 찾아와 아이의 무덤을 파헤치자 무덤 안의 콩과 팥이 병졸들로 변하고 있는 중이었다. 결국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아이는 부활 직전에 들켜서 실패하고 만다."
우리 나라에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 '아기장수 설화'의 줄거리다. 역사는 다른 세상을 꿈꾸다가 좌절했던 인물들과 사건들의 연속이다. 우리 현대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나라의 안위가 풍전등화와 같았던 20세기 후반에 서양사상과 문물을 들여와 나라를 부강 시키자는 개화파의 개혁정책이 수구파에게 짓밟혀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도 아기장수 설화의 데자뷰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조선을 버렸다』는 개화파의 리더로 갑신정변을 이끌었던 김옥균과 그와 대척점에서 개혁을 저지하고 끝내는 김옥균을 암살까지 하는 홍종우의 삶을 여러 면에서 조명하고 있다.

책은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등이 단발령보다 훨씬 이전에 상투를 자르고 양복을 입은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들은 제국열강을 바라보는 마음이 조급했고, 정체된 조선과 불화하며 다른 조선을 꿈꿨던 몽상가'로 묘사한다. 홍종우는 황국협회 주역인 수구파로 기억되지만 한국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고 파리 사교 무대에서 한복을 고집한 민족주의자였으며, 프랑스 체류시절의 경험으로 제국주의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현실주의자로 표현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이 두 사람을 제국주의 격랑에 휘말린 조선이 취할 수 있는 두 반응의 양극단에 서서 변혁을 시도했지만, 한쪽은 제국주의 일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어설픔으로, 다른 한쪽은 기득권 수구세력에 밀려 실패한 개혁가로 평가한다.

 

1894년 3월 28일 오후 4시쯤, 홍종우는 중국 상하이에 있는 김옥균의 숙소에서 책을 읽고 있는 김옥균을 권총 세발을 쏴 사살했다. 이 그림은 당시 상황을 묘사한 장면이다.

 

근대 청년은 같은 곳을 바라보며 엇갈린 꿈을 꿨다. 조선을 버리고 싶어 했던 김옥균은 일본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현실적 수단을 어설프게 흉내 내다 그들의 힘에 말리고 말았다. 조선을 버리고 싶어 했던 홍종우는 주체적인 근대화를 꿈꿨지만 기득권이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스스로의 구상을 제시하기도 전에 좌초하고 말았다. 그들의 바람처럼 조선은 조선이 아니게 되었지만 이후 전개된 한국 현대사는 그들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홍종우와 김옥균의 삶처럼 우리들의 현대사는 지독하게 서투르고 치열했던 시간들의 반복이었다.
탈조선이니 헬조선이니 하는 구호가 요란한 한편으로는 정치의 계절을 맞아 다수결로 선출될 이에게 굉장히 많은 변화를 일임하고자 하는 바람들로 아우성치고 있다. 다른 세상을 꿈꾸는 각각의 기대와 바람들은 때로 상생이 아닌 극렬한 갈등으로 치닫기도 한다. 마치 홍종우와 김옥균이 끝내 죽고 죽이는 관계가 되었듯이 말이다.
신념과 신념이 맞부딪쳐 생기는 갈등은 지금 여기에서 절실하게 해결되어야 하는 숙제다. 어느 것도 정답일 없는 다양한 생각들이 대립으로 치달을 역사는 항상 서투른 진지함에 복수했다. 우리가 역사에서 정답을 찾았던 근대청년들이 빚어낸 비극에 주목해야 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