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에우리피데스 원작 존 바턴, 케네스 카벤더 재창작 '헤카베'

clint 2023. 2. 14. 18:23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그리스 침략군은 바람을 기다리며 이웃나라 트라키아의 해안에 집결해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트로이의 막내왕자 폴리도로스의 유령이 나타나 보호자 트라키아의 왕에게 살해당한 폴리도로스는 누나 폴릭세나의 죽음을 예고한다. 간밤에 악몽에 잠을 설친 헤카베는 트로이 포로 코러스가 전해준 불길한 소식을 듣고, 딸 폴릭세나를 불러 장래를 걱정한다. 아킬레우스의 유언에 따라 그리스군은 포로로 끌려온 트로이의 공주 폴릭세나의 희생을 결정한다. 헤카베는 오디세우스에게 정의와 규범을 빗대어 딸의 생명을 애원한다.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폴릭세나 는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기보다는 죽음을 맞으러 당당히 제단으로 걸어간다. 아가멤논의 부관 탈티비오스가 폴릭세나의 숭고한 죽음을 보고하지만 헤카베는 위로 받기를 거부한다. 바닷가에서 폴리도로스의 시체가 발견되자, 헤카베는 황금에 눈이 멀어 아들을 죽인 트라키아의 왕 폴리메스토르의 복수를 다짐한다. 폴릭세나의 장례를 치르기 위하여 찾아온 아가멤논에게 헤카베는 폴리도로스의 복수를 허락받는다. 헤카베는 트로이 포로 여인들을 시켜서 폴리메스토르 왕을 유인해 두 눈을 찔러 멀게 하고 아들을 찢어 죽인다. 아가멤논은 두 사람을 재판하여 폴리메스토르의 범죄를 처단한다. 마침내 바람이 불어오자, 헤카베는 운명처럼 개가 되어 그리스 군을 따라 바다로 나간다.

 

 

<트로이의 여인들>에서의 헤카베는 이 모든 살육을 수동적으로 슬퍼하면서 남편을 잃은 며느리 안드로마케에게 충고한다. "새로운 주인에게 복종하거라.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너를 사랑하도록 해라. 네가 그걸 잘 한다면 우리 모두가 편할 거야. <트로이의 여인들>에서 에우리피데스는 전쟁으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이지만,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슬픔을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 순응해 나가는 것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반면 <트로이의 여인들>보다 먼저 쓰여진 <헤카베>에서의 헤카베는 그저 죽어 나가는 딸과 아들을 바라보며 수동적으로 전쟁의 비극을 소화하고 있지 않다. 헤키베는 여기에서 딸을 지키기 위해 그리스의 오디세우스와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남자들처럼 용기를 가지고 아들의 복수를 위해 폭력을 행사한다. 헤카베는 이제 더 이상 안드로마케에게 말했듯이 우리의 안전을 위해 새주인의 맘에 들어야 한다고 부탁하지 않는다. <헤카베>에서 그녀는 아가멤논에게 '자기 딸을 데리고 잔 몫을 요구한다.

<헤카베>의 트로이의 여인들은 차라리 디오니소스신의 여제관들을 닮아 있다. 그들은 복수를 감행하기 위해 희생물을 유인해서 그의 자식들을 죽이고 자신들과 같은 고통을 맛보도록 한다. 한번도 더럽혀지지 않은 여인들의 흰 손이 피를 묻히고 그 전쟁의 폭력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그리고 헤카베는 사면 받지 못한다. 그녀는 개가 되어 바닷길의 이정표가 될 뿐이다. 죽음과 폭력의 여신 헤카테(Hecate)의 가장 사랑하는 동물인 개가 되는 것으로 헤카베는 폭력으로 인해 여성성과 인간성을 잃고 야만의 세계, 무생물의 세계로 던져지게 된다. 남자의 덕으로 여성성을 잃어버린 헤카베에게 내린 저주는 남성과 여성의 위치가 분명하고 가져야 할 덕목이 구분된 그리스인들에게는 당연한 결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트로이 전쟁

아마 서구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전쟁 중의 하나가 바로 트로이 전쟁일 것이다.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로부터 비롯된 많은 시들이 트로이 전쟁을 다루었고 〈헤카베〉와 같은 많은 연극들 이 트로이 전쟁의 비극사를 보여주었다. 트로이 전쟁에 대한 거의 모든 이야기는 호머의 <일리아드>로부터 시작된다. 아프로디테 여신의 도움으로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는 그리스의 미녀 헬레네를 트로이로 데려올 수 있었다. 왕비를 빼앗긴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우스는 그리스 동맹군을 이끌고 트로이와의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와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이야기를 주축으로 호머의 일리아드는 어떻게 전쟁이 두 나라의 영웅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지를 노래한다. 헥토르와 파리스의 어머니이지 트로이의 왕비인 헤카베는 아들이 일으킨 전쟁으로 자신이 가장 믿는 큰 아들이 죽어 개처럼 끌려다니는 것을 본다. 그리고 전쟁을 일으킨 파리스가 죽고서 나머지 아들들이 헬레네를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벌이는 것도 헤카베는 지켜본다.

하지만 트로이는 여전히 그리스 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고 초조해진 그리스군은 오디세우스의 계략에 따라 목마를 해안가에 버려 두고 퇴각을 해버린다. 그리스군이 오랜 전쟁에 지쳐 물러났다고 여긴 트로이 사람들은 목마를 성안에 들여놓는다. 그 안에 숨어있던 그리스 군과 성밖의 군사들의 협공으로 트로이는 어이없게 무너져 버리고 트로이의 용사들은 잠자리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개같은 죽음을 당하고 여인들은 노예로, 그리스로 끌려가게 된다. 이로써 트로이의 꿈 같은 영화는 사라진다.

 

 

트로이 전쟁은 단지 전설만이 아니다. 고대 트로이는 흑해와 에게해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이고 유럽으로 들어갈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을 차지하고 있었던 도시국가였다. 트로이는 지정학적인 이점을 이용해 통행세를 걷거나 독점상업을 함으로써 많은 재화를 쉽게 거머쥐었다. 트로이는 엄청난 부를 바탕으로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었다. 그리스가 일으킨 트로이 전쟁은 바로 트로이의 부와 지정학적 위치가 가지는 이점을 뺏고자 함이었다일리아드를 비롯한 많은 이야기의 배경이 된 트로이: 발굴된 유적에 따르면 지진 후에 지어진 트로이는 요새 안의 쓸 수 있는 모든 공간에 빡빡하게 집이 들어 있었고 거의 모든 집이 땅속에 여러 개의 거대한 항아리를 묻어 입구만 땅 위로 나와 있도록 해서 식량을 저장했었다. 밀집되어 있는 마을의 형태와 그 들만의 특이한 식량저장법으로 미루어본다면 그들이 거의 10년간 그리스군의 포위를 견디었다는 것은 사실로 믿어진다. 그 위를 뒤엎은 화재의 잔재와 거리와 집터에서 흩어진 채 발굴된 뼈로 볼 때 트로이 함락 후 엄청난 약탈과 살육이 감행되었음을 느끼게 한다기원전 1260년에서 1240년사이에 멸망한 트로이의 이야기는 그 역사적인 진실보다 진실에 담겨있는 전쟁의 비극을 가장 처절하게 드러내는 소재로 쓰여 져 많은 시와 극에서 되풀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