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엘 도르프만 '독자'
“독자“는 통상적인 사실주의 테두리를 뛰어넘는 발상과 테크닉을 화려하게 구사하면서도 현실비판의 견결함을 잃지 않는 독특한 작품이다. 우선 이 작품의 화자가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민중작가가 아니라 그의 작품의 ‘독자’일 수밖에 없는 검열관이라는 설정부터 특이하다면 특이하다. 민중작가랄 수 있는 도르프만으로서는 칠레의 상황을 ‘적’의 입장에서 읽어보려는 시도인 것이다. 작품은 매우 사실적인 필치로 ‘교황’이라는 별명을 가진 한 노련한 검열관의 메마른 일상을 실감 있게 그려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던 이야기의 흐름은 이 검열관이 한 민중작가의 『변모』라는 작품 속에서 자신과 흡사한 인물을 발견하면서부터 급진전한다. ‘현실의 이야기’와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맞부딪치는 가운데 작품은 현실의 삶을 박진감 있게 그려낼 뿐 아니라, 어느덧 현실의 변화가능성까지 모색한다. 이 작품에서 도르프만이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메타픽션 적인 요소를 현실탐구의 도구로 활용하는 솜씨는 감탄할 만하다. 솜씨도 대단하거니와, 더욱 놀라운 것은 작가가 민중의 적일 수밖에 없는 검열관과 일종의 대화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적과의 대화’를 통해 변혁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다.
<독자>는 언론을 탄압하는 독재정권 산하에서 외로운 글쓰기를 하는 저항 작가를 화자로 한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의 특별한 '독자'일 수밖에 없는 검열관의 심리, 즉 적의 입장에 초점을 맞춘 것이 매력적이었다. 검열관으로서 단 한 건의 실수도 없이 '교황'이라는 별명이 붙어있는 돈 알폰소는 한 민중작가의 <변모>라는 작품에서 마치 누군가가 그 자신을 그대로 책장 위에 옮겨 놓은 듯한, 모습에 관한 묘사에 이르러서는 숨이 막힐 정도로 똑같은 작중 인물을 발견하고는 출판업자로 위장해 직접 작가를 만나러간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마침내 날 알아보고 문학 속에서 날 불멸의 인간으로 만들었는데, 하필이면 출판되지 않을 책에다 그런단 말이야." (42쪽)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이 작품을 출판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당신 출판사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오. 출판되느냐 아니냐는 이 작품에, 나한테, 당신한테, 이 나라의 시민 하나하나한테 달려있어요. 자그마한 노력 하나하나가 정부를 무너뜨립니다. 어쩌면 당신은 5백년 후면 내 책을 읽을 수 있을 겁니다."
"아니면 내년에." 그의 아내가 덧붙였다. "아니, 모레라도 읽을 수 있죠." (63쪽)
<변모>의 인가여부는 (자신은 현 정권의 충복이지만 아들만은 학위를 마칠 때까지, 졸업장을 손에 쥘 때까지, 의사로서 안정될 때까지, 정치와는 일말의 관련도 없이 기다리라고 당부하고 싶은) 그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투시한다면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원고수정 후 승인'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인가'라고 적혀 있는 종이 한 장을 꺼내어 주저 없이 서명하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