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우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오후의 어느 서점.
서점 주인, 43세의 경진과 서점 아르바이트생, 17세 은수가 얘기한다.
곧 개학이 되면 학교로 가야해 알바가 어려워진 은수와 어느 대머리 시인의 강연에 다녀온 경진,
그 강연회에서 그 시인이 한 소년의 칼에 찔려 죽었다는 얘기를 하며,
그 소년의 얘기를 또 한다. 시인 선생님과과 테니스 치던 얘기.
공을 보고 테니스 치는 게 아니라 상대 선수의 눈을 보고 치라는 얘기…
이야기는 어느새 은수가 어느 손님이 시집을 훔치려던 얘기로 옮겨지고
은수와 경진은 이야기 속의 상대역을 번갈아 하며 장면을 구성한다.
대머리 시인의 얘기가 또 나온다.
서점주인은 경찰서에 참고인 진술하러 가고 은수는 홀로 남아
그 대머리 시인의 시집을 집어 들며 끝난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기형도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다. 여섯 개의 줄이 모두 끊어져
나는 오래 전부터 그 기트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때 나의 슬픔과
걱정들을 오선지 위로 데리고 가 부드러운 음자리로 배열해주던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가끔씩 텅 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그 기타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나는 경악한다. 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 기타 소리가 멎으면 더듬더듬 나는 양초를
찾는다. 그렇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이상한 연주를 들으면서 어떨 때는 내 몸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도 있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기형도는 28세의 젊은 나이로 작은 시집 하나와 몇 편의 소설만을 남기고 사망했다. 사인조차 심장마비라는 기형도답다면 기형도다운 죽음이었다. 이 젊은 시인의 시집 하나가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문학도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은 문학계에서 유일무이한 그의 위치를 확인시켜준다. 기형도의 작품은 고통 속에 있는 듯한 화자와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압권이다. 하지만 단순히 분위기 만으로 그를 위대한 시인의 반열에 오르게 한 것은 아니다. 30년 동안이나 그의 시를 읽게 만든 원동력은 그가 고통 속에 있으면서도 희망으로 노래했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