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근 '흔해 빠진 독서'
30대 후반의 언니와 30대 중반인 여동생이 명절 연휴 마지막 날 저녁에 친정에서 대화한다.
명절 휴가가 끝나기 전 책을 다 읽겠다는 언니와,
그걸 아직도 다 못 읽었냐는 동생의 말다툼이 이어진다.
언니는 형부가 당직이라 오늘 여기서 자고 간다 하고,
동생은 이 집에서 엄마와 살았는데, 엄마가 입원해서 예년 같지 않다.
그 책이 바로 기형도의 『흔해 빠진 독서』이고 예전에 언니가 엄마에게 선물한 책이었다.
흔해 빠진 독서/ 기형도
휴일의 대부분은 죽은 자들에 대한 추억에 바쳐진다
죽은 자들은 모두가 겸손하며, 그 생애는 이해하기 쉽다
나 역시 여태껏 수많은 사람들을 허용했지만
때때로 죽은 자들에게 나를 빌려주고 싶을 때가 있다
수북한 턱수염이 매력적인 이 두꺼운 책의 저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불행한 생을 보냈다, 위대한 작가들이란
대부분 비슷한 삶을 살다 갔다, 그들이 선택한 삶은 이제 없다
몇 개의 도회지를 방랑하며 청춘을 탕진한 작가는
엎질러진 것이 가난뿐인 거리에서 일자리를 찾는 중이다
그는 분명 그 누구보다 인생의 고통을 잘 이해하게 되겠지만
종잇장만 바스락거릴 뿐, 틀림없이 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럴 때마다 내 손가락들은 까닭 없이 성급해지는 것이다
휴일이 지나가면 그뿐, 그 누가 나를 빌려 가겠는가
나는 분명 감동적인 충고를 늘어놓을 저 자를 눕혀두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저녁의 거리로 나간다
휴일의 행인들은 하나같이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그러면 종종 묻고 싶어진다, 내 무시무시한 생애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이 거추장스러운 마음을 망치기 위해
가엾게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흙탕물 주위를 나는 기웃거렸던가!
그러면 그대들은 말한다, 당신 같은 사람은 너무 많이 읽었다고
대부분 쓸모없는 죽은 자들을 당신이 좀 덜어가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