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범 '태수는 왜?'

이 극은 "어머닌... 내가 죽였어요'라는 태수의 자백으로부터 시작해서 태수의 자서전이 완성되는 순서로 진행된다. 곧 태수의 기억과 말은 자서전이라는 글의 형태로 기록되고, 그것이 다시 필수의 대필에 의해서 재편집되고, 제3자의 서평이 덧보태지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기억이 말이 되고, 다시 글이 되고, 제2, 제3의 시선에 의해 재편집되고 완성되는 과정을 통해 기억이란 그 자체가 재구성되고 허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절묘하게 보여준다. 서로가 공유하는 특정 시간의 기억이 각자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회상, 재구성, 재편집되어 한 권의 자서전으로 완성되는 형식이 재미있다.

과거 군부정권시대 정치 라인을 타고 승승장구해, 말년엔 엄청난 부를 쌓아 사회 기부를 하다 생을 마감한 회장님의 이야기는 어딘가 익숙하다. 그런 회장님을 아버지로 둔 아들의 성장기와 그런 회장님을 남편으로 둔 여자의 평생 또한 짐작하기 어려운 서사는 분명 아니다. 그리고 하나 더, 회장님은 설상가상인지, 금상첨화인지, 하필 베트남전 당시 그곳에서 만난 현지 여인과의 사이에 딸을 하나 두고 있다. 물론 훗날 회장님은 베트남으로 사업을 확장하며 그들을 다시 찾아간다. 자, 이 정도면 완벽한 회장님 필요충분세트를 전부 갖추셨다. 하지만 주인공이 회장님이면 재미가 없다. 회장님의 아들에겐 성장배경도 성격도, 그와는 판이하게 다른 친구가 하나 있는데, 둘은 한 여자를 사랑한다. 그리고 여기서 반전. 놀랍게도 회장님의 베트남 딸은 그들이 사랑한 그 여자와 판박이로 닮아 또 다른 비극을 부르고야 만다. 이야기가 이쯤 되면 이들 사이에 일어날 비극의 조각을 끼워 맞추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분명 우리 주변에 그 누구도 이런 삶을 살았던 사람은 없을진대, 어째서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자기 손금 들여다보듯이 훤히 꿰뚫어 볼 수 있는 걸까. 한국 사회는 지난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이러한 회장님 내러티브를 반복적으로 재생산해 오길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떠한 반성도 없이 그것을 하나의 신화로 만들어 버렸고, 의심과 성찰은 끼어들 여지조차 남겨두지 않았다. 새삼 <태수는 왜?>가 이러한 사회의 기만적 테제에 제동 거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연극은 지긋지긋한 복수의 드라마가 아닌, 그 모든 것들의 근원을 파헤친다.
익숙한 내러티브에도 불구하고 <태수는 왜?>의 서사를 따라오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이 작품의 극작은 단순한 플롯을 거부하고 시공간을 넘나들며 등장인물들의 시점을 교차시킨다. 주인공 태수가 어머니의 살인죄를 자백하고 경찰서에 잡혀온 이후, 이야기는 그를 수사하는 두 형사의 현재와 태수의 과거를 구성하는 필수와 미림, 응웬의 갈림길로 접어든다. 독특한 것은, 양쪽 길 모두 태수가 집필하고, 필수가 출판해주기로 했던 소설의 흐름을 따라간다는 것. 미스터리하게도, 형사들이 태수의 자백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몰두한 그의 자전적 소설은 허구인지 실제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구성을 취한다. 게다가 형사가 소설에 의문을 품을 때마다 그것의 진위 여부를 증명이라도 하듯, 태수와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삽입되면, 여지없이 필수가 나타나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소설을 이어주는 매개자 역할을 하니, 이건 더더욱 어딘가 심상치 않다. 하지만 연극의 낯선 구조에 익숙해지고 나면, 본격적으로 이 작품의 백미를 감상할 사유의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드디어 ‘왜?’라고 질문하기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태수는 왜? 필수는? 미림은, 응웬은 왜 그러는 걸까? 태수의 아버지는, 태수의 어머니는 왜 그랬던 것일까? 이제껏 단 한번도 품어보지 못했던 의혹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신화는 해체되고 전설과도 같은 그들이 저질렀던 ‘죄’ 그것을 통해 관객들은 인간의 원형에 접근한다. 그렇게 많은 죄를 저지르면서도 그것이 죄가 되는 줄 몰랐던 이들, 그리고 그로 인해 짓이겨진 이들의 현실과 복수, 허망함. 그 생생한 이야기의 단면들은 비단 그 죄가 얼마나 악질적이었는가를 고발하는 차원을 넘어, 그렇게 자행되었던 일들의 거짓된 포장을 벗겨 인간 존재가 극복하지 못한 본능을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이제는 당당하게 그 오랜 현혹의 시대에 종말을 고할 수 있을 것인가. 연극은 묻는다

태수의 이름으로 발간되는 이 소설은 태수가 초안을 쓰고, 필수가 이를 윤색하는 방식으로 쓰여졌으며, 태수의 돈으로, 필수의 출판사에서 출판된다. 형사 동호는 태수의 모친 살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단서를 찾기 위해 태수의 소설을 읽는다. 허구의 소설을 통해서 현실 속 사건의 진실을 찾으려 하는 독자 동호의 행위는, 허구적 글쓰기의 현실적 힘에 대해 말해준다. 소설은 태수의 범죄는 물론, 태수의 자살까지도 미리 말해주고 있다. 특히 태수의 체포이후 필수가 혼자 고쳐쓴 태수의 죽음에 대한 부분은 글쓰기의 주체와 행위의 주체가 같지 않지만 결국 하나임을 알려준다.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가 태수의 손을 잡고 자신의 가슴을 찌르게 하는 것은 태수로 하여금 죄인임을 부인하지 못하게 하는 다짐을 위한 것이다. 죄많은 아버지가 선행을 통해서 쉽게 죄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용서하지 않듯이 태수가 스스로의 삶을 정당화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움직임이다. 어머니는 갈비뼈와 갈비뼈 사이의 옴폭한 지점을 왼손의 손끝으로 짚고 그 자리에 칼을 갖다대고는 말했다.
“날 죽여줘. 그렇게 쉽게 해방되려고 하지 마.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그렇게 쉽게 도망치려고 하지 마. 너 혼자 선량한 인간으로 살아갈 생각은 하지 말아”
그런데 태수의 죄는 무엇일까? 태수의 죄는 필수의 죄와 다르지 않다. 그들의 죄는 쉽게 타협하는 삶을 산 것이다. 민주화를 주장하면서도 기회가 생길 때 마다 그들은 타협했다. 돈과 타협하고, 지위와 타협한 한 세대의 삶의 불완전성을 이 작품은 태수를 통해 질문하고 있다. 태수는 왜, 우리는 왜 이처럼 살았는지를. 글을 쓰는 행위는 쉽게 도망치지 않고 스스로를 죄와 끊임없이 대면시키는 행위이다. 태수와 필수가 서로의 글쓰기를 고쳐가면서 서로의 비겁함을 지속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이 그들의 소설쓰기 방식이다. 그 행위를 통해서만 둘은 서로를 용서할 수 있다.
태수는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했다. 그리고 태수는 자신의 주변에 있었던 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다. 하지만 그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이제야 진실은 베일을 벗는다. 태수를 희생시켰던 것은 그의 아버지도, 그의 환경도, 어쩔 수 없는 시대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들 모두는 무엇을 위한 의식인지 알 수 없는 그것을 위해 태수를 제물로 삼았던 것이다. <태수는 왜?>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그 당시 이야기로 다시 한 번 한국 근현대사를 통렬히 꼬집고,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인간을 꾸짖는다. 이제 태수의 죄를, 그리고 그들 모두의 죄를, 지난 시대가 안고 있던 끔찍한 비극의 죄악을 벗겨줘야 하는 것은 우리의 과제로 남았다. 죄에 대한 성찰, 그것이 없다면 결국 우리 모두는 공범자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고영범 작, <태수는 왜?>는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스>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스>는 복수의 이야기다. 그것도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복수,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복수라는 살벌한 복수의 이야기다. 왜 오레스테스일까? 왜 새삼 복수의 이야기일까? 작가 고영범은 이 오래된 복수의 이야기를 지금 현재의 시점으로 가져와 우리가 잊고 있었던 어떤 '죄'에 대해서 다시 뒤돌아보라고 말한다. 마치 오래전 이피게니아의 희생을 잊지 않고 아가멤논에게 복수하는 클리탐네스트라처럼, 또다시 아버지 아가멤논의 죽음을 잊지 않고 어머니 클리탐네스트라에게 복수하는 오레스테스처럼. 그리하여 복수는 복수의 행위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자체에 의해서 완성될 뿐이라는 사실을 집요하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어떤 죄인가? <태수는 왜?>는 한국판 오레스테스인 태수를 중심으로 박통때 잘 나갔던 군인 아버지와 아무것도 부러울 게 없는 부르주아의 자식 태수의 수직축과 1991-92년의 분신 정국에서 '일종의 스타가 된 태수와 그에게 시(詩)와, 여자와 운동의 명분까지 빼앗기며 "바보 같은 개구리'의 삶으로 표류하게 된 필수와의 우정과 배신이라는 수평축을 교차시키며 우리의 역사와 사회가 "반성 없는 건망증“을 앓고 있음을 고발한다. 흥미로운 것은 마치 우성과 열성의 이란성 쌍둥이와 같은 존재로 설정된 태수와 필수 이야기의 시작을 이들이 대학생일 때, '학생운동은 이제 무용담이나 농담거리‘가 되어가고 있었던 1991-92년의 시점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여기에는 작가 고영범의 개인적인 경험이 투사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1990년대 이후 달라진 시대 속에서 역사적· 사회적 대의명분을 잃고 한낱 시끄러운 '개구리들' 취급을 받으며 조롱받았던 이들 불우한 세대에 대한 작가의 깊은 연민이 반영되어 있다.
어찌 보면 <태수는 왜?>에서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죄의식이란 군사정권 하에서 수많은 사람의 피를 자신의 손에 묻혔던 태수 아버지의 명백한 죄에 대한 비난이기보다는 변화하는 시대의 논리에 의해 순결한 젊은이들을 이용하고 물어뜯는 '전갈 같은 시대의 변심’에 대해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변심한 애인 앞에서 '사랑이 어떻게 변해?" 라고 답답한 마음을 토로하듯이, 작가는 우리 시대의 건망증 자체에 대해서 문제 제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기에 이 작품은 살인이라는 복수의 행위 자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기억하고 기록하고 재편집하는, 그리하여 끊임없이 계속되는 고통스러운 기억의 과정 자체에 주목하는 것은 아닐까. 결국 복수는 끝까지 기억하는 자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이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