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정영욱 '나는 이와같이 들었다'

clint 2022. 11. 30. 11:00

 

 

작가 정영욱 작가의 이 작품 나는 이와같이 들었다은 난해하다. 그래서 공연이 안 되고 있는지 모른다. 때는 먼 훗날 속 아주 옛날 추운 겨울. 곳은 강 곁 곳곳으로 되어있고 객석이 강으로 설정되어 있다. 늙은이들과 늙은 아낙들, 그리고 젊은이(, ) 몇몇이 나오는데 중반쯤 되어서야 이들의 연관성이 나온다. 늙은이, 아낙들이 젊었을 때 아낙들이 북으로 끌려가고 간신히 애들 몇 명을 구해내고 그 아이들은 동네 유모들에 의해 키워졌단다. 늙은이들은 그렇게 떠난 늙은 아낙들을 못내 아쉬워하고 그런 한이 그리움과 같이 대물림되고... 장성해 청년이 된 수, 결도 그런 그리움과 한, 거기에 아버지 대에 대한 불신까지 더해 있다. 그러나 강물이 흐르듯 세월은 흐르고 늙은이도 끌려간 아낙들도 물어 빠져 죽거나 늙어 죽거나 했고 수도 젖먹이 친구 결에 의해 칼을 맞는다. 결이만 이곳 강가를 배타고 떠난다.

 

모든 대사나 지문이 싯귀 같이 쓰여져 있기에 정영욱의 공연작<버들개지>의 실패를 분석한 연극평론가 조만수의 글을 압축해본다.

 

정영욱

 

말과 시 그리고 문학과 연극 : 조만수

작가 정영욱에게는 이 흔치않은 공연 기회가 도리어 이후의 글쓰기를 위한 큰 시련으로 다가온 듯하다. 젊은 세대 작가 중에서 드물게 섬세하게 언어를 닦고 보듬을 줄 아는 작가라는 긍정적인 평가는 그러나 상당히 문학적일 수는 있으나 전혀 연극적이지 못하다”(김미도, ‘비연극적 언어, 개념 없는 연출’)는 치명적인 평가 앞에서 이내 지워지고 만다. “대사뿐만 아니라 작품의 구조도 비연극적이라고 평가된 그녀의 작품은 급기야 희곡 선정에 있어서 서울연극제의 공신력 자체를 문제삼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공연으로서의 <버들개지>의 실패가 과연 희곡 자체가 지닌 연극언어로서의 치명적인 약점때문이었을까?

희곡이라고 하는 문학의 한 특수한 장르에 문학적이라는 관형어는 역설적이게도 매우 불편한 어감을 준다. 이는 희곡이 하나의 잠재태로서 무대 위에서 연극적인 방식으로 형상화될 때에만 충만한 의미를 획득한다는 기본적인, 그리고 당연한 가정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학적인 희곡은 연극화될 수 있는 잠재태로서의 결함을 지닌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렇다면 이때 문학적이라는 표현은 희곡적이라기보다는 문학의 다른 장르 즉 시나 소설적인 면모를 지닌 것을 지칭한다. 그런데 희곡이 시나 소설과 구분되는 것은 그것을 이루는 언어의 결의 차별성보다는 대화체로 이루어진 그 형식 자체에 있다. 물론 대화체로 이루어진 하나의 글이 희곡으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극 행위라는 것이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극 행위란 드라마나 사건 등과 혼동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 극 행위란 갈등의 동의어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갈등을 내포한 모든 대화체의 글은 희곡이라 지칭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문학적이라고 단정하는 정영욱 작가의 작품은 특별한 언어 그 자체였다. 작가 정영욱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정영욱의 희곡에 대한 평가를 바라보면서 오랫동안 품어왔던 한 가지 질문을 해본다. 정말 문학적인 것과 연극적인 것은 희곡이라는 장르 속에서공연에서가 아니라대립하는 것인가정영욱의 언어가 지닌 시적인 면모는 대사가 지닌 은유와 상징 혹은 고운 어휘의 선택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보이지 않는 것에 말을 거는, 특유의 대화의 방식으로부터 생겨난다. 그리고 이와같은 시적인 면모는 결코 연극적인 것과 대립하지 않는다. 연극이라는 것이 결국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의 눈 앞에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희곡에서 그 자체로서 연극적인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안에는 단지 언어가 있을 뿐이며 삶의 무늬가 제각기 다르듯이 언어 또한 그것을 사용하는 이마다 다른 무늬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 연극이 그 언어 중 하나만을 연극의 언어라 인정한다면 유감스럽게도 연극은 풍요로운 삶과 언어를 갖지 못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연극의 언어라는 것이 진정으로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말의 언어 그 자체가 아니라 물질화된 언어를 지칭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 물질화된 언어는 무대 위에 존재한다. 그것은 말뿐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물이며, 움직임이며 한숨이며 숨결이며 무대 위의 그 모든 것이다. 말을 물질로 만드는 것, 시를 문학을 보고 만지게 하는 것, 그것이 연극의 언어일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구축된 시가 다시 말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말이 사물의 의미를 담고 있고 시는 사물 그 자체를 품고 있다면 시가 다시 말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사물에게 다시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시를 이해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시란 반드시 난해할 필요는 없지만, 일상적 언어로 직접 번역되었을 때 사물의 물질성을 다 잃고 마는 섬세한 대상이다. 시는 잠재적인 물질성의 두께를 지닌 희곡 텍스트의 동의어이다. 희곡의 물질성을 해석하고, 그것에 가시적인 물질성을 부여하는 작업, 그리하여 관객이 해석되어지지 않은 희곡의 물질성 속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 연출가의 작업이다. 물론 정영욱의 희곡은 그것을 해독하려 하는 이에게 쉽게 길을 안내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대부분 정영욱이 구축해놓은 미로의 탄탄함 때문이지만, 또 때로는 정영욱 자신이 그려놓은 미로의 지도를 너무도 흐릿하게 그려놓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가는 간혹 자신의 미로에 갇혀 도리어 자신이 길을 잃고 맴돌 때도 있다. 버들개지에서 욱이와 고추, 유순과 명반가루의 관계를 설명하는 몇 가지 모티브와 이미지는 나름대로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계산되어 있으나 다른 이미지들과 쉽사리 섞여들지 못한다. 이러한 현상은 정영욱에게서는 이미지가 범람하기 때문이다. 고깔, 누렁이, 자갈돌, 고추, 종이꽃, 속주머니, 가야금, 수의, 귀뚜라미 소리, 새끼 호랑이, 허물어진 봉분, 꽃다리, 개미집, 벌집, 재봉틀, 병풍, 나비잠자리, 연이의 누런 색 웃옷 등등은 상당수가 동어반복적인 이미지이며 이러한 과잉된 이미지는 정영욱의 시를 자칫 곱기만한 서정시로 보게 할 우려가 있다. 아마도 버들개지에 대한 최근의 비판은 이러한 면모를 지적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주제를 두터운 시공간의 틀 속에서 짜내는 정영욱은 분명 자신만의 언어를 지닌, 우리에게 소중한 한명의 극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