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한현주 '잔다리 건너 제물포'

clint 2022. 10. 19. 09:30

 

 

1924, 인천의 풍경 속에 두 여성이 있다. '제물포 상회'의 지배인인 '인서''잔다리 화방'을 지키고 있는 '이경', 둘이 자리하고 있는 공간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다. 그래서 둘은 서로의 일상을, 서로의 욕망을 들여다본다.

조선인 '계창'이 운영하는 제물포 상회는 더 이상 쌀 등의 물자를 파는 곳이 아니다. 고리대금업으로 돈을 불리는 일에 열중인 곳이다. 하지만 인서의 욕망은 주판알 튕기는 것에 머물러 있지 않다. 인서는 도시를 계획하여 집들을 짓고 팔기도 하는, 일종의 '부동산 디벨로퍼'를 꿈꾼다. 인서는 사장인 계창에게 제안한다. 총독부가 월미도에 이어 두 번째 풍치지구로 한 섬을 지정하려 하고 있는데, 투자해볼 생각이 있냐는 것, 총독부의 계획이 섬 주민들에게 새어들기 전에, 싼값에 집을 사들여 호텔을 짓겠다는 계획이다. 계창은 인서의 위험한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한편 이경이 지키고 있는 잔다리 화방의 진짜 주인은 바로 떠돌이 화가인 아버지 '송근' 이다. 이경은 아버지의 요구에 따라 남의 그림을 수없이 베끼는 일을 해왔다. 하지만 이경은 이제 더 이상 그런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겠다고! 이경의 이 같은 선언에 영향을 준 인물은 바로 노동운동가 '석훈'이다. 위장 취업으로 노동자 조직을 결성하기 위해 애쓰는 그를 보며, 이경은 기꺼이 모임을 위해 화방을 내어준다. 그렇게 화방은 일순간 위험한 공간이 된다. 석훈과 더불어 모임을 함께하는 '영무'는 항구에서 물건을 나를 하역 노동자다. 그는 인서, 이경과 함께 토막촌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다. 영무는 누구보다 인서의 욕망을 잘 안다. 그래서 늘 그녀가 안쓰럽기도 하다. 이제 이 네 명의 청년들이 서로의 욕망과 갈망을 들여다보고 논쟁하며, 1924년의 인천을 가로지른다. 어두운 시대를 뚫고 그들이 꿈꾸는 변화는 위태롭다. 하지만 그들의 걸음은 근대를 가로질러 지금의 우리를 향한다.

 

 

<잔다리 건너 제물포>는 인천의 근대를 배경으로 했다. 일제 강점기라는 어둠 속에서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욕망이 본격적으로 발산되던 시기에 많은 공장과 상회, 여러 은행들은 바다를 향해 열려 있었다. 그 바다를 통해 수많은 물자와 사람이 오고 갔고, 그것은 다양한 욕망의 색을 입었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작품 속 청년들이 가로지르는 1924년의 인천을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작가의 글 - 한현주

"무대에서 우리 근대의 풍경은 주로 경성을 배경으로 그려졌다. 개항장을 필두로 한 인천의 모습이 곧 우리의 근대였음을 너무 오래 잊고 있었다 싶었다. 그 시기의 인천을 들여다보고 알아가는 일이 참 즐거웠다.

시민강좌를 통해 함께 걸음을 내딛고 나서, 더 세세히 들여다보려 보폭을 좁혔다. 지도와 조감도를 통해, 여러 문학 작품을 통해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갔다. 당시의 해안정과 신정, 본정과 사정의 거리를 오고 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청년들이 보였다. 바삐 걷고 뛰고, 응시하고, 때로는 멈춰 서서 자신의 위치를 돌아보는 청년들이 그들이 껴안고 있는 이야기, 그들이 내보이는 이야기 속에 나와 우리의 갈망이 읽혔다. 결핍이 읽혔다. 이 작품이 그때의 인천과 지금의 우리를 잇는 '잔다리'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