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범 '몽유'
"잘자! 내 꿈 꿔~"라는 광고 멘트처럼 원하는 꿈만 꿀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을련만... 그런 바램과는 다르게 우리가 꾸는 꿈들 중에는 기억의 파편들처럼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꿈, 그렇게 소망하는 것들이 이루어져 행복하게 하는 꿈, 당장이라도 깨고 싶은 꿈, 깨서도 다시 꾸고 싶은 꿈, 보일 듯 말 듯 하는 꿈, 현실처럼 너무도 생생한 꿈들이 있다.
꿈은 꿈이기 때문에 즐길 수 있고, 쉽게 잊혀질 수도 있다. 이 작품 <몽유>에서는 20가지의 조각난 꿈들이 서로 맞물려서 하나의 꿈처럼 흘러간다. 이어지는 꿈도 있겠고, 전혀 다른 색으로 동떨어진 듯한 꿈도 있다. 각각의 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없는 사람들이다.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해서 결국 공연취소까지 이르게 하는 연극배우, 군대 꿈에 시달리다가 정신과 의사를 찾아오는 극작가와 악몽을 즐기는 정신과 의사. 남자와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임신을 했다며 자랑스러워하는 소녀. 남산만한 배를 내밀며 달려드는 소녀들에게 둘러싸여 자기 신부를 돌려달라는 남자. 봉숭아 꽃물을 들여서 세계평화를 소원하고 사람을 살려내는 아이들. 신호등 법칙을 들리게 강요하면서 그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교통경찰, 유언비어(소문)를 진실의 유일한 통로이니 믿으라고 외치는 청년. 형사 앞에서 자신의 의지를 표출하지 못한 채 부끄러운 존재가 되는 남자. 장군이 되어 군인들에게 살해당하지만 다시 살아나서 결국 사냥꾼들의 총에 죽는 사람. 아버지를 가두고 형제를 부정하는 형에게 애원하는 동생. 형을, 아우를 찾아 떠도는 이들에게 어디든 갈 수 있는 용마를 파는 할머니와 용마를 산 이들을 사형에 처하는 단속원. 개한테 쫓기던 소녀에게 다시 쫓기는 개. 서로를 간지럼 태우다가 고통스러워하는 두 남자 이렇듯 보기 드문 사람들이 등장하여 꿈이라서 있을 수 있는 일, 꿈이었으면 하는 일들을 보여준다.
꿈에 대한 해석이 다른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몽유>에 등장하는 인물들, 이야기들은 관객 개개인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다. 그것이 작품의 매력일 것이다. 그러나 <몽유>에 얽혀있는 조각난 꿈들 사이에 스며들어 잔잔히 흐르고 있는 것은, 즉 관객들이 꿈에서 깨어났을 때 확실한 이미지로 기억되고 싶은 것은 분명히 있다.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서 맞이하는 현실은 꿈보다도 더 부조리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는 경험은 흔히 하게 되는데, <몽유>에서 보여지는 것은 모든 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 <몽유>를 만나는 순간부터는 자신이 깨어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누 군가의 꿈속을 방문한 듯 편안하게 꿈 구경을 했으면 한다. 꿈 구경을 다 하고서 늘어지는 하품이나 기지개라도 좋다.
"거참! 요상스런 꿈도 다 있네"
작가의 글 – 이상범
한겨울 낮의 꿈. 차라리 악몽이었으면 하는 때가 있습니다. 차라리 꿈이었더라면 바랄 때가 있습니다. 악몽이라면야 잠에서 깨는 순간 벗어날 수 있으련만 악몽 같은 현실 앞에서는 숨어버릴 곳 찾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툴툴 털어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꿈으로 돌릴 수 있었으면. 일상에서 겪는 부조리함이야말로 현실보다는 꿈이려니 착각케 하는 이유 중 으뜸입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 있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담. 아마 꿈일 거야. 암 꿈이겠지, 이 악몽 같은 현실, 부조리한 상황, 꿈 아닌 꿈의 조각들이 〈몽유〉의 옷을 입었습니다. 저는 이런저런 꿈을 꾸는데 당신은 어떤 꿈을 꾸시나요. 제 꿈들은 왜 이럴까요. 혹시 그 꿈들이 어떤 암시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해몽 좀 해주시겠습니까, 이것이 꿈속 자리 어디쯤인 듯 깜깜하고 협소한 스튜디오에 모여 잡힐 듯 말 듯한 꿈을 좇아 몽유(夢遊)하는 이유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쾌몽(快夢)의 나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