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백 '심청'
일평생 9척 상선으로 중국과 무역을 해온 선주는 해마다 어린 처녀들을 제물로 바쳐왔다.
어느덧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는 나이가 된 선주.
마지막 제물이 될 간난을 겉보리 스무 가마에 사왔지만
그녀는 절대로 바다에 빠져 죽지 않겠다고 버틴다.
지극정성 간난을 보좌하지만 소용없는 일. 설상가상,
세 아들은 간난을 설득하는 자식에게 서주자리를 맡기라 한다.
간난이 가엾어진 선주는 결국, 그녀를 도망시킬 궁리를 하는데…
「심청」은 극단 <떼아뜨르 봄날>의 연출가 이수인씨가 두 번 공연 했다. 첫 공연은 2016년 4월 7일부터 5월 22일까지 대학로 나온씨어터에서 하였고, 재공연은 두산아트센터의 초청으로 2017년 3월 3일부터 3월 19일까지 스페이스111(두산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올렸다.
드라마터그 우수진 씨는 공연 팸플릿에 이렇게 썼다.
“이강백의 작품은 쉽지 않다. 관념적으로 쓰여진 문어체 대사들과 전형적인 등장인물들, 그리고 군더더기 없이 설정에 따라 전개되는 사건들과 그것들이 빚어내는 여백의 미………… 이는 문학으로 읽기에는 수월해도 연극으로 무대 위에서 보여주기에는 결코 만만치 않다. 잘못 될 경우 문어체의 대사들은 피상에 그쳐 어색하기 그지없고 등장인물들과 플롯은 작위적으로 보이기 쉬우며 여백은 지루함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이수인의 이강백은 사뭇 다르다. 「심청」 안에서는 이강백 특유의 등장인물들과 언어들이 그대로 살아있으면서도 <떼아뜨르 봄날> 특유의 연극성이 새롭게 더해져 있다. 그 안에서 이강백의 관념적인 언어는 깊이를 얻고 전형적인 인물들은 생기를 띠며 형해(形骸)적인 플롯은 인간과 삶의 본질을 꿰뚫는다. 그리고 <떼아뜨르 봄날>의 음악성과 움직임은 유쾌하면서도 발랄하게, 때로는 서정적이면서도 은밀한 방식으로 이강백이 남겨놓은 여백을 채우고 비우며 생동감 있게 연주한다."
작가의 글 - 이강백
누구나 알고 있듯이 「심청전」은 효(孝)이데올로기를 권장한다. 그런데 아무도 「심청전」을 지어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 자식은 목숨 바쳐 부모를 섬겨라, 도대체 누가 이런 이야기를 만들었을까..... 나는 선주라고 생각한다. 해마다 인당수에 처녀를 제물로 바쳐야 하는 선주로서는 제물을 쉽게 구할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심청전」을 만들어 이 세상에 널리 퍼트린 것이다. 내가 쓴 「심청」에는 심청이 없다. 물론 심학규도 없고 뺑덕어멈도 없다. 제물로 팔려온 가난한 시골 처녀 간난이, 아홉 척의 배를 가진 선주, 선주의 아들 장남, 차남, 막내, 그리고 무역 업무에 능숙한 경리가 있다. 간난이는 효녀가 아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증오가 가득하다. 그녀의 아버지는 노름꾼이며 오입질을 일삼고 아내와 자식을 돌보지 않는다. 그는 겉보리 스무 가마에 딸을 팔았다. 어찌 순순히 제물이 되고 싶겠는가. 바다에 빠져 죽느니 차라리 굶어 죽겠다며 간난이는 식음을 끊고 완강히 저항한다. 선주의 아들들이 꾸짖고, 달래고, 온갖 감언이설로 회유하지만 아무 소용없는 짓이다. 그런데 선주의 태도가 달라졌다. 제물을 강압적으로 배에 태워 보내던 것과는 다르게 망설이다가 출항을 연기한다. 선주는 이제 늙었다. 자신의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인가, 제물 간난이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을 분리 못하고 자꾸만 연계시킨다. 「심청」의 선주와 나는 서로 닮았다. 나도 이제 늙었다. 선주는 가까이 다가온 자신의 죽음을 보았는데 자기 모습이었다고 했다. 나도 그렇다. 나에게 다가오는 죽음이 나 자신과 같은 모습임을 보았다. 즉, 죽음이란 내가 나를 만나는 것, 그리고 죽음이란 내가 나를 등 떠밀어저 알지 못할 허공 밑으로 떨어뜨리는 것이리라. 선주의 아홉 척 배도 내 희곡집 아홉 권과 같다. 선주가 아홉 척 배의 항해를 위해 수많은 제물을 무서운 바다에 바쳤듯이, 나 역시 아홉 권 희곡집을 내놓기 위해 수많은 작품을 두려운 무대의 제물로 삼았다. 선주는 제물 되기를 각오한 간난이에게 간절히 말했다. "마마께서 바다에 뛰어 내리실 때 소인을 기억해 주십시오!" 나도 제물 된 내 작품들에게 똑같이 간절한 심정으로, 부디 나를 기억해 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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