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설유진 '오아시스'

clint 2022. 7. 20. 13:08

 

 

 

이천땡땡년, 세계는 도시와 사막으로 양분된다.

도시와 사막을 잇던 길은 바람에 다 지워지고.

도시의 사람들은 사막을 모르고, 사막의 사람들은 도시를 모르고. 꿈은 악몽 뿐.

도시의 꿈은 사막에, 사막의 꿈은 도시에 있다.

못 가진 자는 가지기 위해, 가진 자는 더 가지기 위해. 매일이 전쟁.

아군 없는 군인이 늘어난다.

사막 한가운데, 호텔 오아시스가 세워진다.

뜨거운 사막 속, 도시를 닮은 곳.

사막보다 높다란 곳, 높다란 깃발, 또 다른 도시.

사막에서 길을 잃은, 오아시스를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

 

 

 

 

오아시스는 끝없는 언어 유희를 통해 세계를 해체하고 다시 가설하기를 반복한다. 사막 한가운데 생긴 호텔 오아시스에 숨겨진 오아시스선을 타고 소행성 충돌을 피하기 위해 차원이동선인 오아시스선을 또 옮겨타야 한다. 이 오아시스는 오아시스 밴드가 좋아하는 모종의 술과 같은 어떤 것을 떠올리게 한다. 전자가 현실 세계의 구조적 서사라면, 후자는 이에 대한 자유로운 배우들의 사유 영역에서 나온 것이다. 오아시스는 어쨌거나 하나의 언어에 올라타고, 그 언어를 다른 언어로 전치시키고, 이를 반복한다연속되는 언어 유희를 통한 문법의 생성은 어떤 시대와 어떤 시간에도 얽매이지 않는 연극을동시에 그러한 시대와 시간을 지시할  있는 연극을 가능하게 한다여러 차례 반복되는 “각하”란 호명은 유령처럼 이를 연기하는 배우의 발화 속에 남아 무대를 떠돈다아마도 그건 가장 강력한 유령과 다름없다초반에  사전적 의미를 열거하고 배경에 대한 설명을 하고 나서도, ‘각하내가제가 과정 아래낡은 질서의 산물로서 스스로 부정되며 변증법적으로 갱신된다 흔적은 더욱 강화되며 자체가 증상의 원환을 구성한다반면이러한 언어 유희에 따른 반복은 초자아에 대한 고착을 벗어나는 하나의 방편이 된다 팔루스 자체를 흐물거리는 덩어리로 무화시키는 과정이다

독재정권에 대한 은유로서 왕의 자리와  권력그리고 무자비한 폭력과 죽음은무대의 -체험으로 제시된다이는 유일하게 이후의 메타-연극이 되기 이전에 ‘순수한’ 연극의 장면이다 역시 20○○ 시대에 포로나(코로나에 대한 언어 유희임을 드러내는 작명시국에 디지털 콘텐츠 연극을 만들기 위한 재현의 일부임이 드러난다작품을 끌고   있는 실질적인 주체가 없이캐릭터뿐만 아니라 스태프 안의 모든 역할이 흩어지고 재배열되어야 하는 상황에서배우들은 1/N 몫을 가지고 공연을 진행하고자 한다

일자와 소수 권력에 집중된 정보의 집중에 대한 비판적 견제이자 대안을 제시하는 기후위기를 맞은 인류가 소수의 특권층만 다른 행성으로 가는 우주선에 탑승한다는 서사의   이라는 영화를 경유하며 이를 다시 써서모든 관객인류의  상징적 개체이자 인류의 대표성을  재현으로서의 관객 포함한 인류 전체가 일차적으로 오아시스선에 탑승한다는 결말을 제시하는 것이다배우들은  명씩 마이크를 전달받아 10부터 카운트다운을 세며 1열부터 2 마지막 열까지 관객을 아우른다배우 스스로가 주체가 되며 관객을 무대로 호명하며 무대를 연장하는 수행적 발화는인류 전체에 대한 구원인류의 평등함이 거세된 ‘지난날의’ 서사에 대한 궁핍함을 판타지적인 증여의 서사로 상쇄하는 것이기도 하다내용적 사실임 직함을 형식적 사실임 직하지 않음으로 바꾼다이는 아직 끝난  아니고극장 모두가 안전한 이동을 위해 간격을 두고 이동할 것을 요청하는 연극 이후의 멘트가 주는 메시지와 맞물린다이는 기후위기와 인류 절멸에 대한 대처대처라면허황한/불가능한 대처일 것이다.라기보다는 세월호 이후극장의 안전 문법이 강조되는 ‘극장이 삶의 경계에 있다라는 진리에 대한 재확인에 가깝다고 보인다다른 한편앞선 -장면에서각하의 방공호로서의 오아시스라는 상징은  ‘좁은  벗어나서 인류 전체가 탑승할  있는 평평하고 거대한 공간이 된다여기서 ‘각하라는 유머의 대상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터져 버리는 지경에 이른다.

 

 

 

 

사실 오아시스에서 디지털 콘텐츠에 대한 연극은 완성보다는  연극을 다루는 과정 자체에 방점이 찍힌다따라서 극은 처음도 그렇지만 일종의    형태가 된다 극은 완성도가 중요하기보다 나아가 형체를   없는 극의 본질을 찾는 것보다 극에 다가가며 질문을 하는 배우들 다른 맥락이 더해지는자율적인 해석과 현재의 의견 제시가 중요해진다서사의 대부분은 발화 주체의  자체로서 성립하며 말보다 움직임에 초점이 맞춰진다배우는 내용 전달의 매개체보다는말과 움직임의 통합된 연기 대신에 말을 하는 ‘주체이거나 움직임의 권능을 마음껏 시연하는 퍼포머에 가까운데스크린의 영상 자막을 통해 서사는 빠르게 전달되며프로시니엄 아치의 개구부에서 무대를 향한  마이크를 들고 내레이션을 하는 것을 통해서사는 빠르게 압축되고 정리되며 배우 대부분은 말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는 말의 지연으로 또한 움직임의 과잉으로 나타나는데각자의 움직임이 자율적이라면따라서 하나의 초점으로 수렴되지 않는다면 넓은 무대의 사방으로 분산된다면말은  일렬로 벌려 자리한 배우들의 틈에서 튀어나온다 사람의 몸을 비집고  사람의 말에 더해진다 더딘 말의 릴레이 발화 방식은 내용을 쌓아 올리기보다  자체를 해체하는 효과를 가져온다마지막에 스르륵 상대 배우 뒤에서 마이크를 전달받아 자신의 발화를 시작하는 배우들의 움직임처럼오아시스 누구도  드러나지 않는모두가 어떤 깊은 연대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데이는 물론 작품의 언어 형식에서 유래하는 것이면서 그를 뚫고 나오는 연극을 만든다는 것에 대한 태도의 재정립으로 보인다이쯤에서 오아시스 열한 명의 배우가 모두 여성 배우 캐스팅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이 온당한 것이었음을 드러내는  충분한 일일 것이다따라서  연극은 마지막에 스스로 반복하는 것처럼 “혁명 대한 연극이고그것은 직접적으로 “사랑으로부터 온다 말의 쌓아 올림에서 나아가 서로에 대한 마주침과 잠깐의 응시의 허용은  작업 과정을 드러내며메타적으로 연극을 지시하는 연극의  다른 과정에서부터 아마 유래했을 이들 안의 특별한 정동으로 감각된다

 

 

 

작가의 글 - 설유진

서울시극단의 제안을 받고 어떤 작품을 올려야 할지 오래 고민했다. 지금의 시간과 세종문화회관이라는 공간이 가진 의미를 찾아보았다. 그리고는 그 의미 속에 사는 작가로서의 나를 돌아보았다. 어떤 일들이 지나갔는지, 쌓였는지 알기 위해 작가가 태어난 1983년을 시작으로 삼아 공부해보았다. 한국과 전세계의 뉴스, 시민 인터뷰, 신문기사, 칼럼, 광고, 쇼 프로그램, 코미디프로그램, 음악, 영화, 드라마 등을 찾아보았다. 1983년부터 시작했지만 더 잘 알기 위해 전으로 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했다. 기억하는 사건과 키워드 위주로 찾아보던 것도 그 전날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다음날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찾다 보니, 있었던 줄도 몰랐던 일들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당시에 주목했던 화젯거리에 사로잡혀 보지 못했던 일들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사람들의 말하는 모습의 변화, 다루는 방식의 변화, 소비하는 대상의 변화, 여러 가지 태도의 변화들이 새롭게 읽히며 많이 울고 웃고 화내고 했다. 이 모든 것이 사람이 하는 일. 나를 포함한 모두를 연민했던 마음은 분노로 이어졌다가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연극은 관객과 만난다. 나는 극작가이자 연출가로서 관객을 만나야 한다. 어떤 이야기로 어떻게 만나야 할까. 수많은 버전의 대본을 쓰고 치우고를 반복했다. 결과적으로 2022년 지금까지의 기억을 영감으로 삼은 꿈같은 작품이 만들었다. 어떤 사람은 어떤 말을 들었을 때 다른 여러 가지가 떠오르는 현상을 겪는다. 또 다른 어떤 사람은 또 다른 것을 떠올린다. 극작가이자 연출가로서, 조심스럽게 정성껏, 혹시라도 무력 감에 빠진 나와 당신과 우리에게, 극장을 나서서도 삶을 지속하는 데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몇 마디 말이 남기를 바라며 만들었다.

완벽한 파라다이스도 아닌 사막의 오아시스, 그 정도가 우리의 인생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막에서 헤매게 되더라도 오아시스를 만난다면 거기 머무는 동안 마른 목도 축이고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하니까, 개인적으로는 연극을 하는 것이 오아시스다. 사람과의 만남이 오아시스를 찾는 일 아닐까 생각한다. 함께 만드는 창작자와 관객까지, 같이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소중한 경험이고 귀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같이 가요. 오아시스로, 혁명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