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 '트랜스!'
살리기 위해 죽는 이야기. 죽음으로써 살아가는 이야기. 그것은 어쩌면 변화의 불변성에 대한 증언일지도 모른다. 또한 사라짐과 돌아옴에 대한 자기 선택, 뜨거우리만치 차가운 그 선택에 대한 영원한 긍정일지도 모른다. <트랜스!>에는 죽음과 헤어짐, 자책의 순간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순간들은 어느새 날아감, 돌아옴, 그침의 순간으로 전환된다.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트랜스’라는 접두사는 ‘결코 완결되지 않음’에 대한 은유이다. 그것은 오로지 완결된 듯한 모양새를 지속해온 단어에 자신을 슬며시 덧대어 일순간 그 단어를 흔들어놓는다. 그 흔들림 속에서야 비로소 단어는 움직인다. 자신의 완결되지 않음을 고백한다. 그리고는 예측 불가능한 곳으로, 미지의 어떤 상태로, 자신의 위치를 옮긴다. 그렇게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언어와 침묵을, 사랑과 이별을, 종으로 횡으로 그으며 달릴 뿐이다. 마치 죽지 않는 것은 언제나 도달할 곳을 알지 못하는, 그저 오늘과 또 다른 오늘 사이에 놓인 움직임일 뿐이라는 것을 예견하듯이 말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희곡 가운데 <새를 기르는 방법(FOR MY ANGEL)>, <우리는 비에 젖어 춥고 비참했지만>, <아포토시스(APOPTOSIS)>, 이상 세 편을 연결해 하나의 작품으로 발표한 것인데 그 가운데 두 작품(<새를 기르는 방법>과 <아포토시스>)은 전시를 위한 오디오 대본에서 공연 대본으로 개작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인 걸까. 세 작품 속에 등장하는 총 여덟 명의 인물에게서는 세상을 살아가며 서로가 서로를 쉽게 떠올리기 힘들 만큼의 아득한 거리감이 느껴지지만, 동시에 그들 사이의 거리감이란, 그 아득함이란,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겨 하나로 포개어질 때에서야 비로소 감각할 수 있는 그 무엇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다른 이야기로의 인력(引力)을 발생시키는 인물들. <트랜스!>의 연출을 맡은 김미란과 세 명의 출연 배우가 만들어 내는 무대 위 시간을 함께 보낸다는 것은 곧 (동물의 시점에서) 인간의 생과 사를 조망하고, (퀴어 여성의 꿈을 매개로) 사라짐과 믿음을 기억하고, (배우와 팬의 대화 속에서) 몸속 세포들의 자살을 논하는 창발적 이야기의 궤적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서로 연결되고 서로를 넘어서며 서로를 향해 전환되고 변형되는 이야기의 생명줄을 함께 이어나간다는 것이다.
<트랜스!>에는 인물들과 그들이 들려주는 특정한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그 이야기는 마치 <새를 기르는 방법> 속 ‘비둘’의 모습처럼 기묘하다. 비교적 앞서 창작된 <우리는 비에 젖어 춥고 비참했지만>에 비해 최근 개작되었다는 <새를 기르는 방법>과 <아포토시스>의 경우에 특히 그러한 느낌을 전해주었는데, 그와 같은 기묘함의 연원으로는 무엇보다도 ‘상태를 서사화하는’ 장영 작가만의 극작 방식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퀴어, 사랑, 동물, 죽음, 연극” 이라는 몸과 마음의 상태, 더 나아가 이러한 상태들이 전환 혹은 전이의 순간 속에 용해되어 흐를 때, 그것은 이야기일 수 있지만 동시에 이야기 너머의 어딘가로 관객의 감각을 끊임없이 추동한다. 이것이지만 동시에 이것에 불과한 것만은 아니라는 신중한 이중성이, 합일 불가능함에 대한 그와 같은 역설이 전체 이야기를 관통한다. 일례로, <새를 기르는 방법> 속 ‘비둘’은 분명 여배우의 모습으로 무대화되지만, 동시에 조사가 삭제된 채 명사로 말을 맺음으로써(“나는 저 하늘을 날고 싶어 마치 피터팬.”) 인간의 언어에 균열을 가한다. 또한 또 다른 등장인물인 ‘인간’이 극장 계단을 날아서 내려가기 전, ‘비둘’은 극장 계단을 걸어서 내려간다. 누가 인간이고 누가 동물인지, 무엇이 인간적인 것이고 무엇이 동물적인 것인지, 혹은 궁극적으로 인간과 동물, 그들이 만들어내는 세계의 구분이란 진정 존재론적 최종 심급(Instanz)일 수 있는 것인지 등등 질문은 점차 파편화되어 어딘가로 흩어진다.
또 다른 작품인 <아포토시스>에 등장하는 배우와 팬의 대화 또한 인상적인데, 배우의 죽는 연기에 대한 팬의 걱정에서부터 출발해 죽음과 포기, 생명과 희생, 단념과 전환 등 연극에 관한 사변적인 대화가 배우와 (어쩌면 또 다른 배우로서의) 팬 사이에서 이어진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끝날 듯이 이어지는 대화의 동력으로 출현하는 바로 그 사변성 (Spekulation)이다. 작품은 관습적인 서사의 전형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관객이나 배우 중 누군가의 일방적 기억 속에 작품 내용을 얽매는 방식 대신에 (작품 속 배우의 말처럼) “설계도 구성도 엉망이지만, 우리가 같이 등장하는 최초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보는 사람마다 각자가 보는 그대로 만들어 내는 이야기. 그제야 관객은 “두고 온 극장을 뒤돌아” 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제야 오늘의 이 자리에서 극장의 내일을 떠올려 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배우는 상기된 채 외친다: “그럼 여기서부터 전환이에요”.
주인공 습경은 동성 연인 전민재와 헤어진 후, 4년 만에 아빠 애석을 불러 술자리를 가진다.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살아온 애석은 힘겨워하는 딸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아빠가 너에게 주는 가르침은 이것뿐이야. 아무것도 사랑하지 마라. 변동하는 것들, 이 세상, 사라지는 것들. 아무것도 좋아하지 마라. 아무것도. 알겠니. 절대로. 아무것도”. 그 무엇과도 엉키지 않고, 그 무엇에도 걸리지 않는 “코뿔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애석의 말과는 달리, 습경이 살아온 지금까지의 삶은 엉킴과 두려움과 실패와 후회, 그리고 악몽의 연속이었다. 그런 습경이 작품 말미에 이르러 코뿔소가 되어 춤을 춘다. 목적도 결과도 없이, 오로지 그 순간만을 춤춘다. 여름 장맛비처럼 쏟아지던 겨울비. 그 속에서 두터운 겨울 옷차림으로 울며 서 있던 습경과 애석. 악몽은 계속될지라도 비는 언젠가 그칠 것이라던 습경의 마지막 대사.
이번 리뷰의 끝에서, <우리는 비에 젖어 춥고 비참했지만>에 등장한 습경과 애석의 모습을, 그들이 실패하며 꿈꾸던 코뿔소의 시간을 기억해본다. 엉키지 않고 걸리지 않고 상처받지 않으려 해도, 아무리 죽거나 죽지 않으려 해도, 떠남의 순간을 비켜서거나 유예하려 해도, 만약 그럴 수 없다면, 도무지 그럴 수 없다면.
작가의 글
작의 - 사랑으로, 넘어가자는 말
「트랜스!」는 신촌극장 라인업 공연을 위해, 기존에 쓴 세 편의 희곡을 하나로 연결한 원고입니다. 아르코 40주년 기념 전시 [없는 극장]에서 2021년 4월에 오디오극으로 발표했던 <아포토시스 (APOPTOSIS)>와 〈새를 기르는 방법(FOR MY ANGEL)>을 연결했습니다. 여기에 2019년 신촌극장 [낭독의 목적 X 김미란]에서 처음 발표했던 <우리는 비에 젖어 춥고 비참했지만>을 함께 묶었습니다. 창작 시점 이후 생각이 달라진 부분들이 많이 있었고, 신촌극장 공연을 함께한 신윤지. 이지혜 · 지승태 배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개작했기에, 「트랜스!」 속 희곡들을 2022년에 다른 형태로 다시 썼습니다. 올해 세 편의 희곡을 다시 읽어나 가면서, 이 이야기들이 인물들의 변신을 통해 한 인간의 에고(Ego)를 넘어서는 트랜스 퍼스널(Transpersonal)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제목을 「트랜스!」로 정했습니다. 굳이 트랜스라는 단어에 느낌표를 붙인 건, "나를 넘어가자, 사랑으로 넘어가자!"는 말을 조금 더 힘차게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관념들이 만들어 놓은 패턴, 타인에 대한 공포와 불안으로 굳어버린 에고를 넘어서면, 타인과 내가 전체로서 연결된 하나이자 사랑임을 느끼게 된다는 말들을 붙잡았고, 쓰고, 고쳤던 것 같습니다. 「트랜스!」 속 캐릭터들은, 사랑에 의해 아주 많이 부서집니다. 부서짐은 오래 누워있게 되는 고통을 낳지만, 견디다 보면 부서진 틈으로 빛이 듭니다. 그렇게 사랑으로 인해 부서져, 어느새 이전과는 전혀 다른 (확장된) 상태가 되어 있는 이들의 목소리를 관객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어느 봄에 천사처럼 찾아왔던 비둘기에 대한 사랑은 사람이 극장을 날아서 내려가게 하고, 4년 만에 만난 아빠는 소년이 되어 나타나 헤어짐으로 아파하는 딸의 곁을 지킵니다. 거듭해죽는 연기를 하는 배우와 그를 끝없이 상실하는 체험을 했던 팬은 마침내 삶이 연극임을 깨닫고, 신의 자리에서 이번 생의 이야기를 고쳐 쓰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트랜스!」는 등장인물이 등장동물이 될 수 있는 연극, 변신 혹은 가뿐한 전환, 퀴어, 사랑, 동물, 죽음, 연극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양자역학은 원자 단위의 세계에서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본질'을 찾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오로지 상호 의존하는 실체 없는 원자들만이 있는 세계, 사실 우리가 생생히 감각하는 이 현실이 실체 없는 세계로서 환(幻)이라면, 연극은 결국 현실이라는 환(幻)을 무대 위에서 드러내 보여주는 작업인 것 같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대 위 배우들은 변신을 통해,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상상하고 확장할 수 있도록 돕는 천사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