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최창근 '바람이 분다'

clint 2022. 5. 7. 12:10

 

 

 

여기 시간과 장소를 짐작할 수 없는 길 위를 질주하는 차 한 대가 있다.

차의 운전수인 해미와 비인은 각각 다른 상처를 품고 있는 인물이다.

 

해미와 비인이 풀어놓는 이야기 속으로 과거와 미래의 환영처럼 노래하는 소녀 이야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들은 떠나온 곳과 가야 할 곳을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단지 바람을 가르며 목적지도 알 수 없는 먼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뿐이다. 서로가 서로의 생채기 난 상처와 아픔을 달래주고 위로하면서 그들이 탄 차는 어느 한 순간 길모퉁이를 돌다가 폭발한다. 그리고 한 번 왔다가는 덧없는 인생처럼 그들 모두는 시간의 저편으로 모습을 감추는데....

 

 

 

 

기댈 곳이라곤 오로지 둘밖에 없었던 오라비와 어린 누이가 있었다. 길 잃은 작은 짐승마냥 서로를 핥아주던 오누이는 어쩌면 사랑을 했을까. 예상치 못한 이별 앞에 아프단 말도 하지 못했던 오라비는 오래도록 누이를 가슴에 품었다. 그것은 속죄이면서 동시에 구원이었고, 함께이지만 함께 할 수 없는 환희는 절망을 동반했다. 그런 오라비와 나란히 길을 헤매이는 남자는 아름다웠던 생의 기억들을 복원조차 할 수 없어 홀로 울음을 참는 이다. 때문에 그들은 반짝이던 시절에 침잠하는 아름다움을 갈망하였으며, 차마 어쩌지 못하는 타나토스에의 유혹에 굴복하였다. 그리고 순간, 그들의 영혼에는 영원과도 같은 평온이 내려앉는다. 한편의 시극과도 같은 이 작품에서 인물들의 대사 사이사이를 채우는 것은 몽환적인 이미지들이다. 달과 별, 꽃과 동물들, 아득히 들려오는 파도 소리, 그리고 바람의 감촉. 오히려 문자 그대로에서 전해지는 잔상들을 떠올려 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혹은 생생한 영상 이미지라면 차라리 괜찮다. 하지만 인물들의 감성을 품어줄 이 거대한 우주를무대 위에 풀어내는 일은 결코 녹록치 않다. 오로지 연극 무대이기에 가능한 표현을 찾길 요구하는 <바람이 분다>는 시각이 청각이 되고 다시 그것이 촉각이 되는 공감각의 향연을 베푼다. 그곳에서 그들과 내가, 그리고 우리 모두의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술래에게 들키기 위한 숨바꼭질을 시작한다.

 

봄날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유리창을 빗맞은 햇살이 눈을 찔러 시린 울음을 울었다. 애써 마음을 게워 내려 하여도 못내 지울 수 없는 여린 향수가 있었다. 그런데도 삶이 살아지는 게 저주스러웠고, 가끔은 웃을 줄도 아는 스스로가 가증스러웠다. 시간은 자꾸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려, 기억의 매듭이 풀리고 생채기는 쉬이 아물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 한구석을 베고 누워, 문득문득 심장을 저릿하게 하는 기억에도 종말은 있을까. 이것은 기억과 망각에 대한 이야기다. 어쩌면 기억나지 않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다. 바람이 분다.

 

 

 

 

2003<서산에 해 지면은 달 떠온단다>로 처음 실험극장과 인연을 맺은 극작가 최창근의 신작 <바람이분다>는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 독특한 변주를 꾀하는 작품이다. 작가 특유의 서정성이 짙게 묻어나는 이야기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혼재한다. 꿈인지 현실인지 아득하기만 한 시공간을 부유하는 인물들은 살아있어도 사는 것이 아니고 죽어서도 죽은 것이 아니다. 소망이 간절한 만큼 언젠가는 반드시 만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의 인연들에게 손을 내미는 일... 무대 위, 그들이 읊조리는 기억은 돌이키고 싶은 시절과 그 너머의 아름다움에 대한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