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에르드만 '자살자'
<자살자>는 러시아 극작가인 니콜라이 에르드만(Nicolai Erdman 1900~1970)의 두 번째 희곡이다. 에르드만은 1925년, 25살의 나이로 첫 번째 희곡인 <임명장>을 발표한다. 메이에르홀드의 연출로 성공적인 데뷔를 한 에르드만은 1929년에 두 번째 작품 <자살자> 를 발표한다. 그러나 스탈린 정권의 공산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 이 작품은 곧 출판금지를 당한다. 1933년 에르드만은 체포되어 수용소로 보내진다. 3년 후 감금생활에서 풀려나지만 그는 더 이상 극작을 하지 않고 시나리오나 텔레비전 극본을 쓰다가 1970년에 사망하였다. 작가의 조국 러시아에서는 출판도, 공연도 할 수 없었던 희곡 <자살자>가 서구의 연극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 이후이다. 뉴욕과 영국의 소극장에서 간간이 영어로 공연되던 이 작품을 본격적으로 알린 사람은 프랑스의 극작가 미셀 비나베르이다. 비나베르는 자신의 작품집에 부침(浮沈)의 역사를 겪은 이 작품을 번안의 형태로 각색하여 소개하였다.
이야기는 실업자인 세미욘이 새벽에 배가 고프다고 자는 아내를 깨우면서 시작된다. 단잠에 빠져있던 아내 마리아는 남편에게 잔소리를 퍼붓는다. 그러나 부부싸움을 한 후 남편이 보이지 않자 아내는 실직 상태인 남편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자살할지도 모른다고 짐작하며 이웃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도와주기는커녕 자신들의 명분을 위하여 세미욘의 자살을 부추긴다. 정작 자살할 마음이 없던 세미욘은 대의를 위하여 죽어가야 할 사람으로 치부된다. 인물간의 갈등을 유발하는 이러한 사건은 오해를 불러오고 소통되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대사는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웃음을 선사한다. 결국 세미욘은 자신의 장례식에서 살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를 천명한다. 그러나 갑자기 예상 밖의 다른 인물이 자살한다. 극은 이렇게 열린 결말 속에서 막을 내린다.
<자살자>의 부제는 <어느 시대의 초상화>이다. 이것은 에르드만 이 작품의 구상에 있어서 풍자성에 많은 관심을 두었던 것을 의미한다. 특히 빅토르가 전하는 페쟈의 유언이자, 작품의 마지막 대사인 “포드세칼니코프가 옳다. 살 가치가 없다”라는 유언은 이 작품이 가지는 강한 사회풍자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다. 해서 자살의 직접적인 원인은 ‘살 가치가 없는’ 소비에트 현실로 맞추어지는 듯이 보인다. 다음에서 보듯이 주인공인 세미욘은 자신의 자살 원인과 자신의 처지를 혁명의 탓으로 돌린다. 떠들썩한 자살 소동에도 불구하고 그가 원했던 것은 “조용한 삶”이었고,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많지도 적지도 않은 “적절한 월급”일 뿐이었다. 혁명은 그에게 소박한 일자리와 월급이나마 강탈해 갔으며, 심지어 전기화 정책으로 전등은 달아주었으나 세미욘의 집은 요금 미납의 이유로 단전시켜 버렸다. 이렇게 소비에트의 대중 집단주의를 비롯한 소비에트 현실의 억압성과 위협성은 세미욘의 독백을 통해 때론 직접적이고 때론 암시적으로 작품 곳곳에 드러난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는 세미욘이 자살을 시도하는 궁극적이고 실존적인 이유를 찾는 것보다, 오히려 그의 자살시도가 얼마나 가볍고 우발적이며 심각하지 않은 것인가를 강조하여 지적하는 것이 더욱 생산적인 것으로 보인다. 자살의 이유는 얼마든 타자들에 의해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자살의 본질적인, 실존적인 이유를 세미욘에게서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게다가 그는 자살하지도 않는다. 그의 자살은 희극화되고 양식화될 따름이다.
이 작품의 희극성과 풍자성이라는 구조가 해명된다. 두 자살, 즉 페쟈의 실존적 자살과 세미욘의 신경성 증상으로서의 자살시도가 대비되면서, 작품은 풍자성과 희극성을 동시에 획득한다. 이 작품이 매우 가벼운 인물들과 엉뚱한 사건들을 통해 섬뜩한 현실을 고발할 수 있는 이유이다.

역자의 글 - 김경옥
필자는 2011년 아비뇽 페스티발 in에 초대받았던 <자살자>(파트릭 피노 연출) 공연을 인상 깊게 관극한 후 프랑스어 판본(러시아어 원문 <Samo oubiytsa>의 앙드레 말코비치 번역 <Le Suicidé>)을 번역하였다. 20세기 초의 작품이지만 개인과 집단의 갈등이나 실업이 야기 하는 실존적 고민과 자살 충동 등이 우리 사회의 현 상황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스타니슬라브스키가 천재적인 작품이라고 극찬했던 이 희곡을 소개하고 싶은 마음에 중역임에도 불구하고 번역을 감행했으나 러시아문학전공자가 보기에 턱없이 부족할 것이라 사료되어 전공자들의 질정을 바라는 바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