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다니자키 준이치로 '흰 여우 온천'

clint 2021. 12. 31. 17:27

 

 

흰 여우 온천1923년 작품으로 다니자키가 가장 활발하게 희곡을 집필하던 시기에 창작되었다. 달 밝은 밤 흰 여우가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을 본 자는 여우에 홀려 버린다는 속설을 바탕으로, 고베의 양복점에서 일하던 가쿠타로가 정신이 이상해져서 고향으로 돌아온 뒤, 밤마다 산골짜기 계곡의 온천탕 주변을 배회하다가 백인 여성 로사로 둔갑한 흰 여우에게 홀려 익사한다는 내용이다. 흰 여우의 표상은 다니자키 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로, 이 작품에서는 달빛을 받으며 은은하게 빛나는 여우의 새하얀 털과 백인 여성의 하얀 살갗이 오버랩 되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다니자키는 여러 작품을 통해 희고 고귀한 영원(永遠)의 여성상으로서 어머니의 모습에 흰 여우의 이미지를 투영하거나, 이 작품에서와 같이 마성의 매력으로 남성의 몸과 마음을 모조리 빼앗아 버리는 매혹적인 요부를 흰 여우의 화신으로 묘사해 왔으며, 백인 여성의 흰 피부에 대한 동경을 빈번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흰 여우 온천에서 가쿠타로가 로사에게 매료되어 로사의 모습을 한 여우에게 홀리는 모습은 백인 여성- 흰 여우- ()의 표상으로 연결된다. 미의 표상으로서의 여우와 백인 여성 로사가 온천탕의 뿌연 수증기, 달빛, 계곡 등의 배경과 어우러져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무대 공간을 머릿속에 떠올려가며 지문의 문장을 읽다 보면 가부키의 한 장면이 연상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