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반 '바다로 나가는 사람들'

clint 2021. 11. 25. 13:37

 

 

 

<바다로 나가는 사람들>. 이 극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바다. 그리고 작가는 바다를 안다. 그는 실로 바닷사람의 아들인지 모른다. <바다로 나가는 사람들>의 아내였고 어머니였던 바다를 아는 한 여인을 바다는 인도한다. 인간의 모든 상대성과 허무성을 초월한 진정한 자유에로.

 

아일랜드 작가 썽의 <The Riders to the sea>(바다로 가는 기사들)에서 주인공인 노파 모리야는 마지막 남은 아들의 시신이 들어오는 날, 이제 더 이상 바다가 그녀에게서 뺏어갈 것이 없음을 느끼기에 체념을 넘어선 평화를 체험한다. 그녀는 침묵 속에서 막내아들의 시신에 성수를 뿌리며, () 앞에 무릎 꿇고 기도 올리는 것으로 이 극은 끝나고 있다.

동해 바다가 마지막 아들의 목숨을 앗아가던 날, 동해안의 한 어촌의 한 노파는 피가 뛰고, 가슴에 힘이 솟구침을 이상하게 체험하며 외쳤다. “그래 가자!"고 그것은 몸조차 제대로 가눌 수 없는, 곡과 눈물조차 거두어진 탈진과 체념의 극한 너머로, 자아포기와 함께 울던 저 애란 섬의 노파 모리야의 평화의 체험과는 다르다. 이 동해안 어촌의 이름 없는 노파는, 어쩌면 사르뜨르가 말한 고난의 뒤안 너머에서 시작되는 진정한 삶을 이미 살아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바닷물이 뚝뚝 떨어지는 아들의 시신이 마를 새라, 바다로 보낼 것을 재촉한다. 여기엔 성수를 뿌리고, 성호를 긋고, 기도를 올리는 의식이 구태여 요구되지 않는다. 어쩌면 과도 통하는 이 바다를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선택했고, 그 속에서 살기를 결단했기에, 아니 이미 그 바다를 살아오고 있었기에, 굳이 바다로 나가죽은 아들을 위해 올릴 예배의식은 필요치 않다바다로 나가 빠져 죽은 아들 마이클의 시신이 아직 발견되지 못했음을 비난하며, 그의 시신이 언젠가 들어오기를 고대하며, 그날을 위해, 그를 위해 물에 깊은 무덤(Deep Grave)을 만들어 줄 마지막 남자로서, 집안에 남아있어 주기를 간청하며 바다로 나가는 막내아들 바틀리의 발길을 만류하던 모리야. 꿈자리가 사나워 남편의 발길을 만류하고자 하던 쌍가매를 나무라며 막내아들 길수의 바다로 나가는 발걸음을 재촉하는 동해안의 노파이 마지막 아들이 시체로 들어왔을 때 바닷사람의 시체를 뭍으로 들여온 어부들을 호통치며 거기서 살아라하는 저 바다로 서둘러 내보내는 그녀...

바다와 더불어 사는 삶. 그녀에겐 이 하루하루가 다름 아닌 예배였다. 바다는, 바로 생명의 품이었고 신의 품이었으므로 여기에 신 앞에 바칠 예배의식이 따로 필요없음은 물론이다.

여기에서 저 아일랜드의 대표적인 극작가 썽의 최대작으로 꼽는 <The Riders to the Sea>에서 한걸음 나아간 놀라움이 있다. 결국, 결정론과 숙명론을 극복할 수 없었던 유진 오닐의 저 좌절로 끝나는 에필로그”(“Frustrating epilogue")를 기억하며, 오닐도 씽도 보여줄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새로운 기능성이 우리 한국 작가를 통해, 우리의 동해 바닷속에서 구현되고 있음을 발견함은 가슴 뛰는 희열이 아닐 수 없다. 이제까지 너무 서구 희곡만을 짝사랑해오지 않았나 하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The Riders to the S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