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광섭 '함박눈'

clint 2021. 11. 22. 21:45

 

 

 

한 지붕 아래 살고 있는 노교수와 혼전의 여제자 간의 애틋한 인간애, 그러나 이들을 둘러싼 가족들은 용납할 수 없는 이상 관계로 단정하고 나름대로 이간(離間)공세를 편다. 그러나 학창시절에는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던 존경하는 스승, 지금은 신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데다 노경에 돌보는 가족조차 없는 고독한 처지를 외면할 수 없어 노교수의 곁을 훌쩍 떠나지 못한다. 모든 잘못을 남의 책임으로만 떠넘기려는 극도의 개인주의, 서로의 처지를 묵살한 게걸스런 황금만능 사조, 장유유서도 존경의 대상도 전도된 전통 가치관 등등 오늘의 사회 풍조에 비추어볼 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윤정이나 장 교수는 어쩌면 시세에 약지 못한 어리숙한 사람들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윤정이나 장 교수의 모습에서 우리 사회의 내일은 이랬으면 싶다고 소망한다. 내 집 팔아 제자의 혼수 비용에 보태려는 그 마음,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결코 많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장 교수같은 노경의 인물이 보여주는 결단에서 나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한국인 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작가의 글

이 작품은 원래 197021KBS 국제방송 전파를 통해 같은 제목으로 방송된 라디오 드라마를 희곡 화 한 것이다. 그리고 희곡화 한 작품이 수록된 한국희곡작가 협회편 연간희곡집이 1988년도분이었으니 처음 발표된 때로부터 따진다면 무려 18년이라는 세월의 단층이 생겨난 것이다 사람의 생각들도, 세상의 풍속도도 엄청나게 달라져 버렸을 18년 세월의 단층을 사이에 두고 방송극을 들은 사람, 희곡 작품을 읽은 사람의 반응이 어떠했을까는 여기에 구구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 같다. 이 작품의 원안인 방송극이 방송되었던 KBS 국제방송은 아는 바와 같이 대북 방송용 전파 매체다. 대한민국 국민의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드라마화 하여 북한 동포들에게 들려준다는 다분히 목적극적인 성격 때문에 이 작품은 모름지기 서정성을 진하게 추구했었다. 물론 방송극을 희곡화 할 때 작품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있어야 했고, 아울러 등장인물의 성격도 새로 부여되어야 하고, 사건의 전개도 시대 따라 어울리는 것이어야 했지만, 그럼에도 그와 같은 필연적인 요구를 외면하고 모든 흐름을 그대로 둔 것은 남녀 간의 애정관이 사상이나 이념의 차이로 달라질 수 없다는 나 나름의 확고한 신념 때문이었다60대 노인과 20대 미혼 여성 사이에 벌어지는 사랑 이야기다. 더구나 사제 간인 남녀 사이에 그 사랑이 어떻게 원색적, 색정적이거나 추잡할 수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