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민 '달걀의 일'
경주의 할머니의 손에서 자란 성민채는 어린 시절, 집 앞 무덤에서 발견한 알에서 나온 여신에 관한 문서에 자극을 받아 고고학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삼십대 중반이 되어서야 무덤을 발굴하러 내려오지만 발굴권을 얻기 위해서는 시민동의서부터 받아야 한다. 동의서를 얻기 위해 초등학교 동기 중 가장 출세해 국회의원이 된 혁필을 만난 자리에서 혁필은 국회의원이라는 지위에 걸맞지 않게 민채에게 절절매면서 뜻이 애매한 사과를 건넨다. 키워드는 담벼락. 찜찜함을 뒤로 하고 동의 서명을 받기 위해 찾아간 초등학교 교장과 초등 동창 부부를 만나는 과정에서 ‘담벼락’은 점점 실체를 갖춰가며 민채의 무의식으로부터 의식의 수면으로 떠오른다. 연극은 민채가 과거의 사라진 기억을 찾아가는 동시에 민채가 발굴하려는 무덤 주인인 여신의 전설이 같이 진행된다. 할머니가 민채에게 거듭 들려주었던 무덤의 전설에 의하면 무덤 주인은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을 한 새의 몸을 한 괴물이다. 남성들이 아름다운 얼굴에 반해 다가갔다가 번번이 죽음을 당하자 하늘에서 신이 내려와 귀신을 묻어버리고도 다시 살아 돌아올까봐 무덤 앞에 보초를 세운다. 할머니는 자신이 바로 그 보초의 후손이라며 전설에 진실성을 부여한다. 신은 괴물을 퇴치하는 와중에도 싫다는 마을 여자 하나를 겁탈하여 여자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홀로 아이를 낳아 키운다. 주눅 든 아들에게 너의 아버지는 신이니 기죽지 말라고 교육하다가 결국 신이 돌아와 아들을 신으로 만들어주었기에 이 전설은 해피앤딩이라는 것이 할머니의 요점이다. 어렸을 때는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 요상한 이야기가 마냥 재밌었던 민채지만 나이가 들수록 껄끄러워지기 시작한다. 왜 신은 마을 여인을 강간했는지, 왜 여자 얼굴을 한 괴물은 죽임을 당해야만 했는지, 인내한 것은 강간당한 여자인데 왜 상은 아들에게 내리는지 등. 민채는 무덤의 주인은 귀신이 아니라 알에서 나온 최초의 여신이었으나 그 사실을 불경하게 여긴 사람들이 여신을 죽여버리고 대신 그 자리에 남아를 가져다 두었으며 여신을 따랐던 소수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여신의 무덤에 향가를 남겼다고 믿는다. 발굴을 통해 그 사실을 증명하려고 하지만 주민동의서를 받는 길은 지난하다. 죽은 자가 산 자보다 더 대우를 받는다는 경주에서 초등학교 교장은 산 사람은 살아야 할 것 아님 무덤에 묻힌 여신에 대해 되묻는다. “나라를 세우길 했나, 전쟁에 나서길 했나?” 여자가 작은 일인 집안을 돌볼 때 남자들은 큰일인 나라 세우고 전쟁하기를 위해 집 밖으로 나선다는 이른바 빅피처를 그리는 남자들의 이야기가 어김없이 여기서도 등장한다.
종종 남자가 이기적이고 자신만 아는 유아적 존재로 자란 잘못이 그 아들을 키운 어머니 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상의 돌봄 없이는 살 수 없게 키워진 남성은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고, 문제는 사회 전체의 제도나 구조가 아닌, 단순히 여성의 양육 실패로 좁혀져 버린다. 이 문제에서 남성들은 발을 빼고 팔짱을 낀 채 기성세대의 여성과 새로운 세대의 여성의 싸움인 양 마음 편히 강 건너 불구경이 가능해진다. 그렇다고 한다면 괴물을 퇴치하러 온 김에 거부하는 여성을 강간하고 하늘로 내빼버린 신은 아무 잘못도 없고, 신을 그렇게 키운 어머니가 잘못이다. 신에게 어머니가 있기나 하다면 말이지만.
성민채가 끈질기게 집 앞의 괴물 무덤에 집착해온 이유는 오래전에 자신의 내면에 묻어버린 그 폭력의 기억을 딛고 나아가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언젠가는 성민채가 마주할 수밖에 없는 실체이기도 하다. 할머니는 민채가 그 모든 것을 잊기를 바라면서 그 당시의 민채의 모든 물건을 장롱 안 깊숙이 파묻고, 아이였던 민채에게 잊으라고 강요한다. 결국 민채는 자신이 초등학교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던 사실까지도 모두 잊어버리고 완전히 새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또한 할머니는 지속적으로 민채에게 시집가서 남들처럼 살 것과, 인내하는 여성이 될 것을 강요한다. 그러나 실제로 관객의 눈앞에 있는 할머니라는 실체는 세상 다정하고 민채만을 생각하며 사랑을 퍼주는 존재다. 다만, 과거의 경험이나 사회적인 통념에 근거해 볼 때, 할머니는 피해자가 여성일 때 오히려 죄인이 되고 돌팔매를 맞는 게 현실이라 믿고, 민채를 그릇된 방식으로 보호하려 든다.
과거의 고통을 딛고 나아가기보다 차라리 잊고 살기를 바라지만 그러한 종류의 고통은 반드시 수면으로 올라올 수밖에 없다. 민채가 참을 수 없는 부분은,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고 믿었던 존재가 자신에게 가장 큰 고통을 안겨준 사람을 서슴없이 배필로 맞기를 바라는 모습이다. 장롱에서 혁필의 요요, 혁필의 손 안에서 혁필의 말대로 순종하는 요요를 찾아낸 민채의 분노는 자신에게 고통을 준 당사자인 혁필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묻어 버렸던 할머니에게로 향한다. 가르시아 로르까의 연극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에는 여성들만 가득 등장하지만 화제는 늘 남성인 듯이 보인다. 실제로 알바의 딸들이 남자에게 목을 매는 이유는 집을 떠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집안을 억눌러왔던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가 죽자마자 터져나오는 딸들의 욕망은 그들을 억누를 가부장이 사라졌음에서 오는 환희에 가깝다. 하지만 그들은 잘못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누구보다도 가부장 제도를 충실히 이행하려는 어머니 베르나르다 알바가 버티고 서 있기 때문이다. 로르까의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에서 알바와 그 딸들이 사랑에 미쳐 서로를 음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가족이 하나의 제국처럼 권력의 수직선상에서 와해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듯, <달걀의 일>의 할머니도 그렇다. 손녀를 사랑하지만 손녀의 행복은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방향이어야만 하며, 그 방향에는 평판을 잃는 법이 들어가 있지 않다. 그는 여성의 몸에 입힌 가부장제의 총체와도 같은 인물이다. 민채는 날아오르지 못하는 닭을 요리하던 칼을 집어 들어 자신의 평생을 억눌렀던 할머니에게로 향한다. 얼핏 보면 가해자가 아닌 자기 주변의 가장 약한 사람에게 폭력을 되돌린 듯한 형태를 띠지만 그 내면에는 겹겹이 새겨진 고통의 역사가 있다. 할머니는 극중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민채를 사랑하면서도 민채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끔 발목을 잡는 가부장제 사회 전체를 대표한다. 비록 여성이라 해도 그러하다. 때문에 민채에게 있어서 할머니는 자신을 가두는 사회 전체의 집합체이자 극복해야 할 가장 높은 산으로 솟아 있는 인물이다. 그 인물을 극복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보는 관객마다 극명하게 다른 평가를 내리게 될 텐데, 그 또한 할머니라는 범접할 수 없는 위치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대체적으로 영웅은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 소명을 받고, 그 소명을 행할지 말지 고민하다가 조력자나 멘토의 조언을 통해 어드벤처를 떠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영웅의 기가 꺾이는 시점마다 악역 못지않게 도움을 주는 존재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들의 희생이나 도움을 바탕으로 영웅은 새로운 세계에 들어서게 되며 마지막 끝판왕의 시련을 통과하면 그는 영웅의 반열에 어느 정도 올라선다. 하지만 이 작품 속 민채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초등학교 시절 방송반 친구는 민채가 아나운서가 되었어야 한다며, 민채의 진짜 속마음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욕망을 민채에게 투영하고, 그의 남편은 민채를 통해 국회의원이자 권력자인 동기 혁필의 도움으로 중앙 방송국으로 옮겨가고 싶을 뿐이다.
모두가 민채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고 할 때, 유일하게 할머니만 민채를 ‘위해’ 모든 사실을 은폐한다. 사실상 그 은폐를 통해 주인공은 사람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더욱 피폐해지며 자신 안에 숨겨져 있던 (타인은 모두가 알고 있으나 자신만 잊고 있던) 비밀과 마주하게 된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민채에게 남는 것은 존속 살인마라는 가혹한 현실뿐이다. 민채는 누구에게도 영웅으로 남을 수 없다. 오로지 그 자신의 내면에서만 가능한 영웅의 여정이다. 민채가 자신의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할머니를 찌르는 것은 비극이다. 그러나 그들 둘러싼 상황은 그러한 결말로 민채를 밀어부친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민채가 정말로 할머니를 찌른 것이 아니라 민채의 상상 속의 일이라고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실제로는 달라질 게 없다. 어느 쪽이든 민채는 알을 깨고 나온다.
연극 <달걀의 일>은 정리가 좀 더 필요한 작품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신화와 개인의 기억을 한데 엮어 사회의 폐부를 찌르는 작품을 만나는 것은 흔치 않으며 반가운 일이다. 주인공이 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무대 위에서 재현하지 않는 뚝심도 반갑다. 신화의 세계가 좀 더 단단해져서 주인공의 오늘과 더 찰싹 달라 붙어본다면 어떨까? 미워할 수 없는 할머니 역의 이정미 배우에게 느낌표 두 개를 찍어 기억에 남길 참이다. 극이 시작될 때 무덤을 파던 민채가 고통의 기억을 파묻었다면, 극이 끝날 때의 민채는 그 고통을 파낸다. 무덤에서 나온 여신이 닭처럼 먹히지 않고 푸드덕 날아오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