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토마스 베른하르트 '연극쟁이'

clint 2021. 7. 1. 21:32

 

 

번역의 변()에 대한 번역의 변()

 

번역된 책은 변사체나 다름없소. 자동차에 치여서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일그러진 시체 말이에요. 연극쟁이의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1931-1989)는 이렇게 농담 섞인 쓴소리로 번역을 힐난한 바 있다. 그것도 스페인어로 번역된 자신의 책들이 즐비하게 진열된 마드리드의 커다란 책방 앞에서였다. 많은 선배작가들이 그랬지만, 베른하르트만큼 문학작품의 번역 불가설을 강조했던 작가도 드물 것이다. 그러니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가의 작품들은 20세기 후반 독일어권에서 나온 문학작품 중 외국어로 가장 많이 번역된 경우에 속한다. 번역에 대한 베른하르트의 부정적인 발언은 언어를 단지 의미전달 수단으로 보지 않고 문화적 언어는 그 형식 자체가 메시지라는 시각에 기인한다. 시적 언어가 지닌 문학적 감각과 미학적 가치는 다른 언어로 전이되고 전달되면서 때로는 변형되고 망가지는 교통 사고를 겪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문학을 종종 음악작품에 빗대었던 그의 말을 빌려지면 이는 피아노곡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할 때 생기는 변형, 왜곡이 초래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동차가 여행과 물자소통을 위한 필요악이듯 번역 역시 세계문화 소통의 필요악인 것 또한 분명하다. 따라서 번역이라는 자동차에 원작 손님을 심어 국내 독자에게 까지 되도록 큰사고 없이 무사히 태워다드리는 일은 꼭 필요한 일이고 보람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무사고 운전을 기하는 일은 쉽지 않은 과제이기도 하다.

 

확실히 베른하르트의 텍스트는 드론이나 AI와 경쟁해서 살아남아야 하는 이 시대 번역가의 번역 본능과 도전의식을 더욱 자극시키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의 희곡은 구두점을 비롯한 문장부호가 모두 생략되어 있고 서사시처럼 운문 형태를 띠고 있다. 독일어권에서 베른하르트의 연극대본을 받아 든 배우들은 처음에는 당황스러워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곧 음악처럼 언어의 리듬감이 살아있고 시구처럼 내재율이 살아있는 대사에 매료되곤 했다. 특정 단어와 운장의 반복 역시 운율도 살리고 강조 효과도 보장한다. 문장부호가 없는 탓에 의문문인지 서술문인지는 오로지 읽는 사람이 판단해야 할 일이다. 가령 앉아요라는 문장 하나를 보더라도 다의적이다. 물론 사실을 알고 있는지에 대한 확인일 수도, 질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브루스콘의 어법에서 이 표현은 대부분 저기처럼 의미 없는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연결어로 보인다. 번역의 가장 큰 난제는 이런 문장의 리듬, 다익성, 유희성을 가능한 한 살려내는 일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출발어와 도착어의 문화적, 문법적 차이가 너무 커서 미흡한 시도로 그칠 수밖에l 없었음을 고백한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말대로 번역의 변을 피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가 지닌 다의성과 유희성을 극대화시킨 베른하르트의 텍스트와 씨름하면서 연극쟁이의 대사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작품을 번역한 것도 이런 즐거움을 공유하고자 함이다.

 

연극쟁이와 과장의 대가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어느 모로 보나 매스컴 시대가 만들어낸 작가다. 살아있었다면 이제 90세가 되었을 그의 생일을 기념하는 기사는 아직도 독일어권 유수 언론에서 심심치 않게 보인다. 베른하르트 식 문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독특한 어휘와 문체를 신문이나 잡지에 전염시켰던 그만큼 저널리즘을 잘 이해하고 또 잘 이용했던 경우도 사실 없었을 것이다.

그는 현대 독일어권 작가 중 가장 지독한 욕설가요. 독설가라는 평을 들었다. 그는 정치, 사회, 교회를 대상으로 끊임없이 공격의 화살을 쏟아붓고 독일어권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신 나치즘과 소시민적 근성에 대해 신랄한 비판과 독설을 서슴지 않았다. 베른하르트는 별명도 않은데 알프스의 베케트’, ‘인간혐오자등을 비롯해서 심지어는 그가 살고 있던 오스트리아를 하도 많이 비판했다 해서 집안 망치는 놈이라고도 불렸다. 이 별명들은 베른하르트가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작가라는 도덕적 평가를 시사한다반면에 그의 미학적 전략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별명이 있는데 바로 과장의 대가라는 타이틀이다. 그의 연극작품은 무대에 새로 오를 때마다 문화계는 물론 정치권에서도 대단한 관심을 모았고 그렇다고 관객의 반응이 호평일색인 것은 아니었다. 베른하르트의 마지막 드라마 영웅광장은 무대에 오르기도 전에 온 국민을 열띤 논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한쪽에선 일찍이 이보다 더 정확하게 현 시대상을 그려낸 작품은 없었다고 감탄하는가 하면 다른 쪽에선 엄청난 과장과 왜곡이라며 빈의 국립극장 부르크네이터 앞에다 오물더미를 쏟아붓고 쓰레기 같은 연극을 당장에 집어치우라고 공연중지를 외치며 또 하나의 장외 연극을 연출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표현이 불가능한현실을 베른하르트는 그의 연극에서 과연 어떻게 재현하고 있는가?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연극의 한계를 극복하는 그의 작가적 전략은 무엇일까? 베른하르트의 연극쟁이에서 브루스콘은 가는 곳마다 물의를 일으키며 무대 아닌 현실에서 연극을 한다. 그는 자신이 최고의 연극인이고 연출가라며 큰소리를 치고 허풍을 떤다. 브루스콘의 일상은 결국 가족괴 주위 사람들 앞에서 펼치는 허풍쟁이 광대의 연기와 다를 것이 없다. 브루스콘은 식당 홀에서 자신이 맡은 나폴레옹 역이나 스탈린 역을 연습하는 동시에 그야말로 위대한 연극쟁이로서의 역할도 연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브루스콘의 웃지 못할 연극과 광대짓을 보아주고 함께 엮어나가는 그의 가족은 그의 연극 상대역이자 동시에 그 연극의 관객이다. 그러나 어디서 어디까지가 브루스콘의 실체이고 또 연기하는 행위인지 구분이 불가능하므로 여기서는 극중극의 경제가 모호하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 연극을 재래 극중극 구조를- 띤 작품과 구별 짓게 하는 점이기도 하다극중극의 주요 기능은 관객으로 하여금 실제 현실의 연극적 상황 자체에 주의를 돌리게 하는 데 있다. 연극 연습과정에서 내뱉는 브루스콘의 말들은 비단 그의 연극뿐만 아니다.

이 연극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대사가 주인공 브루스콘에게 편중되어 얼핏 보아선 거의 모노드라마와 같은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다른 배역들은 대사가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이 연극이 모노드라마와 다른 점은 무대에 항상 두 사람 이상이 등장해서 독특한 대화형태를 유지시킨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대화는 종래와는 달리 독백과 침묵의 대화이다. 이 대화에서 침묵하며 듣는 쪽은 오로지 그의 표정과 동작으로 반응하는데 바로 여기에 이 연극의 극적 요소가 있다. 왜냐면 암시적이고 복합적인 비언어적 의사 표현은 언어와 언어만이 대결할 때보다 훨씬 더 강하게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코믹효과도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이다관객의 수용관점이라는 측면에서도 이렇게 침묵하는 상대역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면 상대역의 반응을 통해 독백적 언술이 얼마든지 다른 시점을 통해 다시 다양하게 굴절되고 상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어리둥절해하면서, 때로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미치광이 브루스콘의 말을 들이주는 식당주인의 표정과, 느릿느릿한 걸음걸이와 식탁을 시위하듯 거칠게 옮겨 놓는 그의 동작들은 어떤 단어보다 훨씬 풍부하고 강하게 그의 생각을 전달해준다. 마찬가지로 시위적으로 기침을 해대며 독재적이고 폭군적인 남편에게 자기를 주장하는 연극쟁이 부인이나 아버지에 대한 애증을 말보다는 행동으로 표현하는 아들과 딸의 경우도 그러하다.

브루스콘은 자신의 연극을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위대한 걸작이라고 자찬하지만, 주민이 고작 200명밖에 안 되는 외딴 촌구석의 무식쟁이들 앞에서 공연해야 하는 처지에 대해 한탄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것마저 허망한 꿈이었음이 드러나고 만다. 천신만고 끝에 막이 오르려는 그 순간, ‘불이야, 목사관에 불났다?!" 하는 고함소리가 들려와 관객들은 모두, 벼락에 맞아 불난 사택 쪽으로 달려가 버리기 때문이다.

 

 

 

세상은 무대-극중극의 메타드라마

연극쟁이1985년 잘츠부르크 연극제에서 클라우스 파이만 연출로 초연되었다. 작가는 그의 다른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연극현장에서 겪은 실제 경험과 에피소드를 곳곳에 삽입해놓고 있다. 연극쟁이 브루스콘은 자기 연극의 마지막에 비상등을 끌 것을 고집하며 안전법상 허가를 내줄 수 없는 소방서와 소방대장 향해 힐난을 그치지 않는다. 세계종말을 향해 치닫는 역사의 엔딩을 완벽하게 그려내려면 마지막 대단원에서 완전히 깜깜해야 한다는 콘셉트에 관한한 연극쟁이는 현실과 절대 타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 장면은 작가가 실제로 공권력의 지침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뼈아픈 체험을 복수 하겠다는 심정에 의도적으로 삽입한 것이라는 추측이 많았다. 1972<무관심한 놈과 미친 놈> 이 잘츠부르크 연극제에서 초연되었을 때 베른하르트는 연극적 효과를 위해 비상등을 잠깐 끄도록 극장 측에 제의했으나 당국의 제재로 좌절했고, 이로 인해 결국 공연이 중단되는 사태까지 벌어졌었다. 연극쟁이 브루스콘이 이름도 없는 작은 마을에서 기어이 소등허가를 받아내는 장면은 잘츠부르크에서의 소등 스캔들과 대비시켜볼 때 더욱 코믹한 비판적 효과가 있다. 세계적인 문화예술의 도시로 유명한 잘츠부르크기 사실은 관료주의의 행정편의주의에 얽매여 조그만 촌인 우츠바흐만큼도 예술에 대한 이해심을 보이지 못한다는 시니컬한 설정이다. 현실이 너무나 극적이어서 어떤 작가도 현실을 현실상황 그대로 표현해낼 수 없었다.”며 예술의 인위성을 강조하는 베른하르트 예술관은 그러나 예술지상 주의나 탐미주의 현실 도피적인 경향과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 베른하르트 미학의 핵심으로 자주 언급되는 무대메타포는 연극작품의 인위성과 현실과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좋은 지침이 되고 있다. 무대 조명을 아무리 밝게 비춰도 현실과 사물의 실체는 무대 아래 객석으로 세세하게 전달할 수 없다. 그런데 사물의 세부 실체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사물의 윤곽과 그림자는 어두운 무대에서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베른하르트가 어두운 조명으로 세상을 인위적으로 생략하고 과장한 건 어쩌면 그 윤곽을 더 뚜렷하게 보여주려던 노력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쇼펜하우어도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타난 극중극을 예로 들어 예술은 만화경과 같다고 했다. 우리가 보는 현실세계가 주관적 의지의 표명이라면 만화경으로 들여다보는 제한되고 농축된 세계에서는 이 의지 표명이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인위성과 허구성의 렌즈가 더욱 두껍게 장착된 베른하르트의 만화경 역시 현실 속의 허구를 더욱 분명히 드러내려는 또 하나의 의지 표명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