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무 '탈속'
어느 신문사의 종교담당 기자 한 부장이 등장, 무봉이란 스님이 소개되며 연극이 시작된다.
무봉스님. 그는 천애 고아로 핏덩이 시절부터 채운사의 절밥을 먹기 시작했고 성욕이 강해 수행하는데 애를 먹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봉은 7년간의 면벽수행을 마치고 크게 깨달음을 얻어 무문관을 나선다. 그리하여 그의 공개법회가 이뤄지는데, 그때 또 무봉스님은 이른바 '침묵설법'을 보여줄 뿐 단 한마디의 법문도 하려 듣지 않는다. 그러자 그의 '침묵 설법'을 두고 종교계에서는 시시비비론이 일어나게 된다. 한편 한 부장은 신문기자의 신분으로 집요하게 환속승 무봉을 추적하기에 이른다. 그는 환속 승인 무봉의 방황과 역정을 쫒아 그의 진실을 취재하고자 하나 무봉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결국 무봉은 스스로 얼굴에 화상을 입히고 잠적하고 그 후 다시 채운사로 들어가 허드렛일을 하며 기거한다. 계속 무봉의 뒤를 추적한 한 부장은 채운사에 찾아와 여기에 무봉이 있다고 하나 그는 다시 사라진다. 이미 해탈의 경지에 들어간 무봉으로부터 일상적인 논리를 찾고자 했던 자신의 행위가 어리석음을 깨닫는다.
작가의 글 - 김영무
유신론자들은 목숨을 걸고 신(神)의 존재를 입증해 왔다. 그에 반해서 무신론자들은 수많은 회의적 사례들을 제시하면서 신의 존재를 부인하려 들었다. 그들의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아마도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한 생각을 돌리고 보면 여기에 또 엄청난 사실 하나가 있다. 바로 「내」가 존재함으로써 「신의 존재 여부」를 왈가왈부 할 수가 있다는 것. 그렇지 않겠는가? 「내」가 없는데 과연 무엇이 존재하고 말고 란 말인가? 그러니까 「내」 속에 별이 있고, 「내」 속에 신이 있고 「내」속에 악마가 있고 「내」 속에 꽃이 있고 「내」 속에 눈물과 사랑이 있는 것이다. 「내」가 곧 소우주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런데 금방 꼬리를 잇는 또 하나의 근원적인 의문! 「나」는 왜 태어났다가 끝내 죽고 마는가? 이 세상의 모든 종교와 철학의 시발점이기도 한 이 의문은 불가피하게 나에 대한 탐험의 길도 터주고 있었으니… 「나는 누구인가?」 「내」가 「나」의 정체를 제대로 알기만 한다면 나는 죽음의 길에서 벗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따라서 이 엄청난 의문을 풀고자 선 수행자가 생겨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선 수행자들은 「나」를 찾아 길 떠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애를 써서 선 수행자(구도자)의 모습을 추적하고자 했고, 그들의 세계를 넘보고자 했는가?
경우에 따라서는 많은 까닭을 갖다 붙힐 수도 있겠지만, 한 사람의 연극인 입장에서 나는 '그 속에 분명 근사한 연극적인 요소가 잠재해 있다‘는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라 말하고 싶다. 그렇다. 인간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현대인들은 자기의 본 얼굴을 잃어 버린지가 이미 오래전이다. 혹은 일상의 가치관 속에 매몰된 우리는 오직 하나의 덧없는 그림자로 구름 같은 삶만을 영위할 뿐인 것이다. 그래서 「나」를 찾아 방황하는 무봉스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자기 자신을 되찾아 보는 연극적인 재미를 발견해 봤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