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진 '이그니마'
남편과 여행을 가던 길에 당한 교통사고로 첫 아이를 유산한 정희는 남편의 보험 보상금 덕분에 부유한 미망인이 되었지만 사고의 후유증으로 부분적인 기억상실증과 공황장애에 시달리는 광장공포증 환자가 되어 병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짧은 신혼의 기억 뿐 사고전후의 정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정희에게 유일한 의지처가 되어주는 사람은 주치의인 인철이다. 유능한 정신과의사인 인철은 단편적인 정희의 기억을 대필 작가였던 그녀가 직접 극화해 자신의 과거를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런 인철의 노력으로 매번 꾸게 되는 동일한 꿈 <구타하는 남자를 살해하는 여자의 꿈>을 차츰 현실로 인식하게 되는 정희. 그러나 필요 이상으로 자신에게 매달리는 정희에게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미를 눈치 챈 인철은 은밀히 뒷조사에 들어가고 이내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다. 사고가 나기 얼마 전 정희의 남편인 지훈이 보험설계사인 친구를 통해 배우자를 사고사로 위장하여 보상금을 받은 사례를 입수했다는 정보다. '혹시 지훈은 정희를 죽이려하다 재수 없이 자신이 먼저 죽어버린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그가 아내를 죽이려한 것이 단지 돈 때문이었을까?’ 인철의 의문은 뜻밖에 발견된 지훈의 시신으로 서서히 진실과 가까워진다. 교통사고로 산화했다는 지훈이 암매장 된 토막사체로 발견된 것이다. 그렇다면 정희의 옆자리에 탄 남자의 시체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이에 경찰과 공조하여 증거를 입수하려는 목적으로 스스로 부인해 온 정희의 기억을 최면을 통해 밝혀낸 인철은 박약한 의지로 타인에게 기생하는 본능은 폭력과도 다름없는 고질병이자 무의식을 지배하는 악의 실체임을 알아내지만 그 또한 맹목적인 의지처의 배신을 용서치 못하는 정희에게 살해되고 만다. 약자의 본성을 조종하는 악이란 일상을 파괴하는 침입자처럼 더 이상 보호막이 되지 못하는 상대의 방심을 노려 불현듯 돌출 하는 나약함의 무기이기에.
작가의 글
선을 우선으로 일상을 영위하는 사회적인 질서와는 달리 은밀하고 조직적인 악의 본성은 늘 동전의 양면처럼 기회를 노리며 인간의 의지를 조종한다는 전제에서 열등감과 이기심을 조율하지 못해 파국으로 내몰린 등장인물들의 이드의 영역을 빌려 피아의 구분을 흐리게 만드는 나약한 인간의 심성을 그리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