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홍단비 '춘향목은 푸르다'

clint 2021. 5. 17. 16:50

 

"이 이쁜 맘들 뿌리내릴 곳 있어야 하네.“

여의도 개발을 위해 밤섬 폭파와 섬 내 주민 이주가 결정된 1968. 밤섬의 터줏대감 판계명은 폭파될 땅에 자꾸만 나무를 심는다. 창전동으로 이주한 밤섬 주민들과 판계명은 천막생활을 시작하고 집을 지어 올리기로 결정한다. 판계명은 이주한 땅에 숲을 조성한다. 주민들의 한가위 대동굿에 찾아온 시청직원 박강섭은 판계명이 가장 사랑하는 나무 춘향목을 베려 하며 자극하고 갈등은 극으로 치닫게 되는데.

 

 

홍단비의 춘향목은 푸르다는 개발로 밀려난 1960년대 이주민을 다룬 작품이다. 대한민국에서 1960년대는 경제개발에 착수한 시기로 자본주의의 욕망이 불붙기 시작한 때이다. 그 극적 시간 탓인지 이 작품은 나이 든 선배 세대의 작품처럼 사실주의와 마당극을 접목한 형식이어서 크게 새롭지는 않다. 그러나 진정성은 진부함에 굴하지 않고 시류나 세련의 허상을 이겨낸다. 춘향목은 푸르다.가 그런 작품이었다. 희곡을 읽으면서 새로운 감각에 감탄하는 대신 오랜만에 묵직한 감동 속에 존재의 존엄함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너무 쉽게 과거의 것들을 폄훼하고 버리면서 달려왔다. 그러나 이젠 모든 시간이 저마다의 가치를 인정받으며 공존해야 하지 않을까. 현재의 우리를 지탱해온 것이 화려한 도시의 네온이나 고층빌딩의 욕망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존엄함을 잃지 않았던 민초들의 묵묵한 기운이 아닐까.

 

작가의 글

오래전부터 사람들을 품던 밤섬은 사람들의 개발로 폭파되는 수모를 겪는다. 하지만 묵묵히 흐르고 또 쌓여 새들의 고향이자 생태의 천국이 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혼잡한 도시 한가운데에서 야생의 상태로 숨 쉬고 있다. 경이롭다. 밤섬의 사람들도 그렇다. 옮겨지고 또 옮겨지면서도 분노하기보다는 서로 맘을 모으고, 비관하기보다는 함께할 미래를 그렸다. 이 생명력을 다루고 싶었다. 밤섬 이주민들이 세간의 시선처럼 피해자, 불쌍한 실향민으로만 보이지는 않기를. 강물처럼 속절없이 밀려드는 시대에 쓸려 내려가지 않고 서로를 토닥이며 적응한 그들의 생명력이 표현되기를. 은행나무가 은행잎을 모두 떨어뜨려도 가장 소중한 나무뿌리는 그대로이듯 가장 소중한 것들을 지켜낸 이들에게 박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