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청원 '하얀 눈 청노루 눈'
(줄거리)
백두산 근처 북포태산 산사에는 순녀모녀가 명산대처의 등산객을 상대하여 생활터전을 삼아오고 있었다. 딸 지순은 젊은 날 순녀가 정웅에게 강간을 당하여 출생한 사생아였고 이들은 송우의 보살핌으로 정웅이 귀소본능에 의해 찾아올 것을 염원하며 살고 있는 처지였다. 그러나 순녀가 눈사태로 위급해진 송우를 구하려고 떠난 사이에 이번에는 지순이 사냥꾼들에게 윤간을 당하고 실신하게 된다. 때마침 옛 자취를 찾아 산사에 올라온 정웅은 지순을 구하고 그가 자기 소생임을 확인하게 되어 업보의 회한에 빠진다. 순녀도 귀가한다. 그는 딸의 원한까지 사무쳐서 철천지한을 풀기 위해 정웅을 다그쳐서 삼서육례를 갖추어 혼례를 올리고, 신방을 꾸며 황홀한 쌍합지교의 극치를 펼치고, 그리고 유렴된 계획대로 정웅을 죽여서 영원히 자기 것을 만들려고 칼을 뽑아 들기에 이른다. 이승에서 못 이룬 한을 순녀는 정웅을 죽여 시신과 영혼을 자기 것을 만들고 자기도 같이 죽어 저승에서 나마 짝을 지으려고 도모해온 터였다. 처음에는 거역하던 정웅도 순녀의 뜻에 따르게 되고 차마 순녀가 찌르지 못하게 되자 떨군 그 칼로 자진하기에 이른다. 비로소 온전한 자기 것이 된 정웅의 시신을 이끌고 자기도 같이 죽을 채비로 장지로 떠나는 순녀를 모전녀전이 된 지순과 서로 흠모만 했던 송우가 처량하게 배웅을 한다.
이 작품은 한민족의 수난사를 여자가 강간당하는 것으로 압축하여 소재화하고, 인간본능의 욕정이 빚어내는 원죄를 주제로 하여 쓰여졌다. 업보의 불교적 개념과 윤회와 귀소본능의 자연계 생성원리를 구성요소로 하고, 백두산, 명산등정의 빗나간 호연지기와 산사의 사건을 무대요소로 했다. 약육강식의 생태계 생리로 인한 청노루 수난과 사내 힘에 유린당하는 여자의 수난을 애처로운 것들의 恨(한)으로 설정하고, 이들의 복수욕이 폭행자와 혼례를 치러 실추한 명예를 회복하고 그를 죽여 함께 승천의 삶으로 환생하려는 소유본능의 충족으로 그 한을 풀게 설정하였다. 폭력과 수탈은 법으로 제재하고 인성의 방종은 윤리규범으로 제도했으나 오늘의 불륜과 폭동은 더욱 기승을 한다. 해방은 횡포를 부르고 자유는 방종을 부르는 인성의 양면성 비리 때문에 코란경의 계율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물리적인 보복을 집행하도록 하였고, 힘에는 힘으로의 대치가 그것의 남용을 제어하는 첩경의 원리임을 작의로 제시했다. 지천명에 이르면 인간은 인생여정을 되돌아보게 되고 자기과오의 회한에 빠지며 귀소본능에 따라 옛 자취를 되찾는 지각의 순리로 접어든다. 강한 힘에 무참하게 유린당한 애처로운 것들이 여려서 슬프고 애띠어서 청순한 눈매로 되살아나서 온몸을 구비구비 절여들게 하며 끈질긴 생명력으로 질책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의 글>
성욕에 얽힌 불륜행위를 다룬 오이디푸스 왕, 페트라, 느릅나무 밑의 욕정 증은 세계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이들 근친상간이 빚은 죄악과는 다른 차원에서 나는 인간의 성욕이 빚는 죄악을 다뤄보고 싶었다. 그리고 서구적 차원인 인간의 갈등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의 얼과 동양의 사상과 대자연의 섭리 차원까지도 규합해서, 생성원리에 해당하는 만물의 근원적인 性情(성정)의 본질과, 귀소본능의 동물적 근성, 그리고 우주와 불교의 윤회까지도 집합하여, 작품묘사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표면의 얘기는, 인간의 성욕과 소유본능에 얽힌 가장 선명하면서도 단순한 구조를 띠는 얘기로, 이 단순 구조 속에 이상과 같은 본질과 근성과 원리를 명주실로 얽듯이 복합적으로 모두 얽어서, 집약과 농축이 가장 큰 생명인 희곡의 정수를 모색하였다. 초고를 탈고하고 약 5년간 다듬고 또 다듬어 내놓는 이 작품이, 같은 범주의 주제를 다룬 세계의 어느 희곡보다도 우수해야 한다는 집념과 자신을 갖고 완료하기에 이른 것은, 작가라면 비단 나만이 갖는 포부는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