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안톤 체호프 '갈매기'

clint 2021. 3. 28. 21:29

 

 

누군가는 반드시 상대방의 등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인물들의 엇갈린 사랑 이야기가 애처롭게 펼쳐진다. 여기에 문학과 예술을 둘러싼 논쟁이 곳곳에서 전개된다. 웃음과 한숨, 인생에 담긴 거대한 희비극적 요소에 우리의 사유와 인식 그리고 성찰이 다가선다. 삶에 내재한 비의와 본래적인 함의를 끝까지 숙고하도록 인도하는 희곡이다.

 

18951021일 멜리호보에 있던 체호프는 신시대편집장 수보린에게 갈매기를 쓰고 있다는 편지를 보낸다 “11월 말경에 마무리할 희곡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상당히 만족하면서 쓰고 있습니다. 무대조건에 반대하여 무척이나 바보스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요. 희극, 세 개의 여성 배역, 여섯 개의 남성배역, 4, 호수가 보이는 풍경, 문학에 관한 많은 대화, 적은 사건, 5푸드의 사랑." <갈매기>189612월 몇몇 부분의 수정 작업을 마친 다음 러시아 사상에 실려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이 편지에서 우리는 갈매기에 관한 몇몇 정보를 얻어낼 수 있다. 희극이라는 장르 규정, 남녀 배역(실제 희곡에서는 4사람의 여성배역과 6사람의 남성 배역, 일꾼과 요리사, 하녀가 등장한다), 호수가 보이는 풍경을 가진 4막 희곡, 문학과 사랑이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극적인 사건은 많지 않다는 것 등등 갈매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은 남녀의 지독하게 엇갈린 애정관계와 당대에 새로 등장하기 시작한 문예사조인 상징주의와 전통적인 사실주의의 대립관계 및 새로운 형식 추구와 결부한 연극 예술에 대한 논쟁 등이다.

 

 

 

 

성숙한 극작가 체호프의 장막극에는 전통적인 의미의 남녀 주인공이 없다. 따라서 갈매기의 주인공을 트레플료프와 니나로 설정한 18961017일 알렉산드르 극장의 갈매기초연은 당연히 성공할 수 없었다. 다만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그들의 관계가 늘 어긋나 있으며 회복불능 상태라는 사실이다. 트레플료프는 어머니 아르카지나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아르카지나는 아들에게 무관심하다. 트레플료프는 여배우 지망생 니나를 사랑하지만, 그녀는 소설가 트리고린을 사랑한다. 아르카지나는 트리고린과 내연관계에 있지만, 일시적으로 니나에게 트리고린을 빼앗긴다. 니나는 잠시나마 트리고린의 사랑을 얻지만, 이내 그와 작별한다. 마샤는 트레플료프를 사랑하지만, 트레플료프는 그녀를 벌레 보듯 한다. 메드베젠코는 마샤를 사랑하지만, 결혼한 다음에도 마샤는 트레플료프를 잊지 못한다. 이런 식으로 등장인물들의 애정관계는 시종일관 어긋나고 악화될 뿐, 전향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작품에서 핵심적인 문제는 새로운 형식과 상징주의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관점 차이다. 극중극 형식으로 트레플료프가 무대에 올리는 20만 년 뒤의 세계에 대한 통찰은 아르카지나와 트리고린 등으로 대표되는 기존 사실주의에 대한 트레플료프의 강력한 도전이자 문제 제기이다. 아르카지나는 즉각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하며, 트리고린 역시 마뜩치 않은 표정이 역력하다. 반면에 의사인 도른은 트레플료프 희곡에서 무엇인가 새롭고 강력한 것을 포착한다. 그와 같은 새로운 문예조류와 형식의 추구에 2년이 넘는 시간을 투여한 다음 트레플료프가 도달하는 결론은 매우 간명하다. 4막에서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문제는 낡은 형식이나 새로운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쓴다는 것에 있어."

 

 

체호프는 갈매기에서 이와 같은 두 가지 문제를 매우 적은 사건을 통해서 느슨하고 헐거운 극적 갈등으로 보여준다. 더욱이 가장 격렬한 장면이라할 트레플료프의 자살을 희곡의 마지막으로 돌리고, 그 장면을 객석에 보이지 않게 처리함으로써 극적인 효과를 아주 미미한 것으로 만든다. 이것은 체호프 극작술의 전형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다.

알렉산드르 극장의 초연에 대해 체호프는 이미 기대를 접었던 것 같다. 여동생 마리야 체호바의 기록을 보자. “알렉산드르 무대에서 갈매기가 초연되는 날 페테르부르크에 왔다. 오빠가 정거장으로 마중 나왔다. 그의 음울함이 나를 놀라게 했다. 오빠 얼굴에는 모든 게 끝났다고 적혀 있었다. 오빠가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저들은 배역을 몰라. 내 말을 듣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 해. 희곡에서 나올 건 아무것도 없어"’

공연이 실패할 것이라고 예감했던 체호프의 예상은 적중했다. <숲의 수호신> 공연이 참담하게 실패한 뒤로 오래도록 장막극을 쓰지 않았던 체호프는 갈매기의 실패로 다시 한 번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갔다 만 2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다음 모스크바 예술극장 창립 공연으로 갈매기를 생각한 네미로비치-단첸코는 체호프에게 편지를 보낸다. “만일 자네가 희곡을 주지 않는다면, 자넨 날 죽이는 걸세. 왜냐면 갈매기는 연출가인 나를 사로잡은 유일한 현대 희곡이기 때문이야. 그리고 자네는 모범적인 공연 목록을 가지고 극장에 커다란 관심을 제공하는 유일한 현대 극작가이기 때문이야.” 체호프는 상당한 불안과 망설임 끝에 예술극장의 갈매기상연에 동의하게 된다.

18981217일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갈매기초연이 끝난 즉시 네미로비치-단첸코는 체호프에게 전보를 보냈다. “방금 전에 갈매기공연이 끝났다네. 엄청난 성공이야. 1막부터 관객을 사로잡더니 계속해서 성공을 거두었네. 끝없는 앙코르. 3막이 끝나고 난 다음 극작가가 극장에 없다고 말하자 관객들은 자기들 명의로 자네에게 전보를 보내달라고 부탁하더군. 우린 행복에 겨워 미쳐버리는 줄 알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