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가르시아 로르카 '돈 퍼림플린과 벨리사의 사랑'

clint 2015. 11. 8. 12:32

 

 

 

 

 

평범하게 산 그러니까 여자를 모르고 산 남자가 있다. 노을... 이런걸 보지도 않고 낭만을 갖지 못하고 그냥 현재 자기의 하녀와 사는 게 그냥 좋은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부자이다... 그런데 그의 하녀는 자기가 죽으면 외롭게 살 자기 주인을 결혼 시켜야겠다고 마음먹고 앞집에 사는 젊은 벨리사를 그의 아내로 맞게 해줘야겠다, 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엄마 - 돈을 엄청 좋아하고 벨리사란 그녀는 진정한 사랑이 뭔지 모르고 오직 돈만 좋아한다...그 둘은 시간이 지나 결혼을 하게 된다... 사랑을 몰랐던 아니...여자의 육체의 아름다움을 본 그는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 육체적인 사랑이라고 할까? 시간이 지나...그런데 그녀는 첫날밤 5명의 남자와 관계를 맺는다... 참고로 그녀에겐 결혼이란 건 아무 의미도 없다...그러니 다른 남자와 잔다? 이건 아무 상관이 없는 그런 여자다... 그걸 알면서도 그 남잔 그 여자를 사랑한다. 어느 날 그녀는 빨간색 망또를 입은 한 남자를 보게 되고 그를 사랑하게 되고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을...보고 싶어 한다. 너무 사랑하게 된 것이다... 나중에 그년 그의 남편이 보는 앞에서 그에 대해 말하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말한다.... 그녀와 그 빨간 망또의 주인공이 만나는 날이다....
그녀의 남편이 그 남자가 오면 그를 이 칼로 찔러 죽여 버리겠다고 말한다...그래야지 그녀를 사랑하는 그 남자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 테니... 라고 하면서... 그녀는 만약 그를 죽이면 당신도 죽여 버리겠다고 말한다...
잠시 후 빨간 망또를 입은 그 남자가 비틀거리며 그녀의 앞으로 온다... 그는 칼에 찔려 있었다....그녀는 누가 당신을 찔렀냐고 하면서 말한다...그런데 그 빨간 망또는 다름 아닌 그녀의 남편인 돈 퍼림플린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진정한 사랑을 가르치려고 죽은 것이다...` 영원한 사랑을 위해....그는 죽게 되고 막이 내린다...

 

 

 

비록 로르카의 세편의 비극- 'Blood Wedding' (1933) 'Yerma' (1934). 그리고 'The House of Bernada Alba' (1936)은 性的인 좌절을 다룬 作品인바 이 세편의 작품보다 분위기가 경박스럽고 짧기는 하지만 'The Love of Don Perlimplin and Belisa in the garden' (1931) 은 색채가 다 양한 무대 디자인이며 음악. 극적인 행동(연기) 그리고 서정적인 시를 노련하게 가미하고 있다. 비극적인 색채가 짙게 깔린 낭만적인 笑劇인 本 作品은 예술적인 구조상 사랑과 죽음의 주제를 전달하려고 전통적인 요소에다 현대적인 연출법을 섞고 있다.
로르카는 다음과 같은 자신의 劇에 대한 신조를 털어놓고 있다. “연극이란 울며 웃는 학교이며, 살아있는 사람들이 인간의 감정과 마음의 영원한 노래를 살아있는 본보기로 설명해주며, 자유롭게 햇묵고 애매모호한 행위의 척도를 表出해 보여주는 演壇이다.”
로르카는 또한 불길한 재료를 섞어 유머와 페이소스를 신선하고 구김살 없이 구사하면서 가령 官能的인 아내와 결혼하는 천진무구한 노인을 그리는 구수한 옛 얘기도 곧잘 다룬다. 1 月과 五月에 나오는 '상인의 얘기 '가운데 초서는 비근한 상황을 냉소적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질투심 많은 노인'에서 세르반테스는 흔히 이런 상황을 사실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의 기발하고 별난 作品속에서 로르카는 남편의 의식적인 自殺을 通해 도리어 한 인간을 구하며 벨리사와 관능적인 사랑의 아름다움과 한계성 속으로 주인공 돈 퍼림플린을 부각시켜 보고 있다.

 

 

 

 

페더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Federico Garicia Lorca ) (1899〜 1936)
파시스트의 총살집행을 하는 사격분대원이 1936년 8월19일 여명에 페더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를 살해하여 무명 묘지에다 그를 매장했을 때, 스페인은 가장 인기 있었던 20세기 시인을 잃어 버렸고. 현대극 무대는 탁월한 극작가를 상실한 셈이다. 劇界를 휩쓴 공포의 충격에 첨가하여 로르카는 실제로 달포 전에 발발한 스페인 내란의 쌍방 간에 막역한 친구들을 거느린 다분히 정치적인 인물이었다는 아이러니였다.
로르카는 그라나다 주 소속 자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하고 박식한 농부였으며 모친은 교사 경력이 있는 분이었다. 유년에 그의 步行과 대화에 장애를 준 질병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모와 자매들에게 칭찬 받는 명랑하고도 원기 있으며 민감한 젊은이로 成長해 갔다. 그는 자기 집 서재에서 게걸스럽게 독서를 즐겼고, 음악에도 남달리 관심을 나타내어 훗날 작곡가 De Falla 에게 격려를 받기도 했다. 나이 먹은 농사꾼 하인 돌로레스는 그에게 스페인 민요와 전설을 가르쳐 줬다. 가족이 그라나다市로 이사 했을 무렵 그는 재빨리 로마 인들, 무어族들과 스페인 文藝復興으로 부터 갈팡질팡하는 수다한 전통들을 흡수했으며. 天性이 사교적인 그는 안달루시아 지방의 농부들이나 집시들과 어울렸듯이 지성이 풍부한 귀공자들이나 첨단을 걷는 지식인들과도 잘 사귀게 되었다. 그라나다 대학에서 그는 法學을 공부하였으나 그의 관심은 사실상 민속 음악을 조사 한다든지 희화와 문학에 있었다. 이 대학 교수인 퍼난도 드로스 리오스는 1919년 그를 마드리드로 떠나가도록 격려해 주었다. 首都에서 8년간 거주하면서 로르카는 詩. 회화, 연극 그리고 영화에 대한 전 세계적인 文化운동에 강력히 영향을 받았다. 그의 친구들은 시인 제라도 디이고를 포함하여 영화감독 루이스 부누엘 그리고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있었다. 로르카는 화가, 극작가, 음악가, 그리고 특별히 시인으로서 인정받았다. 1928년 출판된 그의 'Gypsy Ballads' 는 전통적이며 현대적 기교를 성공적으로 수용한 것으로서 스페인 언어권에서 그의 명성을 드높였다.

 


1929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大學에서 1년간 체재했다. 거기서 그는 얼마간의 과정을 이수했지만 대부분 시간을 흑인 음악을 섭취하느라고 할렘 빈민가를 누볐으며, 허드슨 江을 따라 부두며 교량들, 월街며 마천루를 관찰하면서 쏘다녔다. Catskills 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동안 그는 'Poet in New york' 卷末 속에 포함된 시를 썼다. 아바나에 강의를 초청받아 그는 쿠바로 건너가 따뜻한 환대를 받았는데, 그곳에서 잔재해 있는 스페인의 음악과 연극의 전통에 곧바로 일체감을 느끼기도 하였다. 1930년 여름 그는 스페인에 돌아왔을 때, 自覺面에서도 성숙을 보여줬으며 시극에 渾身의 정력을 바칠 각오를 다졌다. 1931년 스페인 국왕이 도주를 하고 공화국이 선포되자 로르카는 고립된 촌락에서 고전과 현대극을 공연하기 위한 學生들로 構成된 '이동극단'을 조직해 달라는 부탁을 이제는 문교부 장관이 된 로스 리오스에게서 받았다. 이 단체 'La Barraca' 를 위해 로르카는 재래의 민요를 손질했으며 'Blood Wedding' 과 'Yerma' 같은 창작劇을 썼다. 스페인 각주에 사는 민중에게 연극을 도입하여 성공적으로 실험한 덕분에 로르카의 명성은 라틴 아메리카 全域에 떨쳤다. 1933 년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초대받아 스페인 황금기의 고전극과 자신의 창작극을 공연하였다. 이와 같은 공연 여행은 그의 성공을 재삼 알리는 기회가 되어 로르카는 급기야 국제적 文學 애호가들의 축하를 받게 되었다. 그의 생애의 마지막 해를 맞아 그는 또 다른 시집을 펴려고 몰두했고, 'The House of Bernada Alba'란 그의 최후의 민속 비극을 완성하기도 했다.
1936년 7월 로르카는 가족을 동반하고 산 페더리코 聖日을 축하하러 마드리드로 돌아갔다. 바로 그 달에 공화국에 항거하는 반란이 시작되어, '콜롬비아와 멕시코에 와달라는 초대를 거절하고 친구들의 만류를 물리친 로르카는 그라나다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8월 18일에 그는 로잘레스 一家의 가족을 방문했는데 그 집은 팔랑헤 당원 본부였다. 그곳에서 프랑스의 민병대 소속 ‘B- lack Squads' 단원 중 한 대원에게 체포 구금당했다. 시인 루이스 로잘레스는 로르카의 막역한 친구였다. 로르카의 비극적인 죽음은 1930 년대 스페인 연극중흥의 종막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