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희 '한낮의 유령'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오갈 곳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원. 그곳에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이들이 누군가를 찾기 위해 나타난다. 노인은 오늘도 평소처럼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 공원을 찾은 사람들은 노인에게 그들이 찾는 사람에 대해 묻는다. 노인에게 그들의 이야기는 어디선가 들었던 것만 같은 익숙한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그들이 찾는 사람이 그가 기다리던 친구일지도 모른다고, 노인은 생각한다. 어느 여름의 한낮. 모두가 비슷한 사람처럼 보이는 그 공원에서, 노인은 오지 않는 그의 친구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심사평 ; 세대를 망라한 다양한 주제의 뛰어난 수작 대거 몰려
예상을 훌쩍 뛰어넘은 응모 편수에 먼저 놀랐고, 높은 기량을 보여주는 작품이 많아서 거듭 놀랐다. 응모작들을 읽고 추려나가는 동안 심사자들은 행복한 고민 속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꼭 전하고 싶다. 마지막까지 심사자들의 손을 떠나지 않은 작품은 네 편이었다. 희곡 '늙은 개의 산책', '스탭', '한낮의 유령'과 시나리오 '고도의 괴물' 모두 탄탄한 기본기 위에 자신만의 뚜렷한 개성을 쌓아올린 탁월한 작품이었다. 네 편의 작품이 각각 고유한 미덕을 지니고 있는 까닭에 많은 논의를 거듭해야 했지만, '한낮의 유령'이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다는 점에는 빠르게 의견일치를 보았다.
제목 자체가 독특한 울림을 주는 '한낮의 유령'은 한국사회의 주요 현안인 가족해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공원의 벤치라는 한정된 공간과 소수의 인물 활용은 단막극의 전형적인 설정이지만 작품을 단조롭고 지루하게 만들 우려도 있다. 작가는 시차를 두고 드나드는 각 세대를 대표하는 등장인물을 이용하여 그 한계를 극복하면서, 가족해체 현상의 다양한 측면을 함께 건드렸다. 늙은 아버지의 가출을 의도적으로 방임했던 남자는 그를 찾기 위해 공원에 왔고, 이혼으로 어머니를 잃어버린 다문화 가정의 소년은 빚쟁이를 피해 도망간 아버지를 찾아 공원으로 왔다. 그 둘을 매개하는 노인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상대방의 처지를 제멋대로 재단해버리는 폐쇄성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생동감 넘치는 인물들이 서로 얽히면서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가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한다. 다만 3장에 등장하는 순경이 이야기의 마무리를 위한 '의도적인 해설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점이 못내 아쉬웠다.
심사위원: 김재석(경북대 교수), 최창근(극작가 겸 연출가)
당선소감
당선 전화를 받고 한동안은 멍하니 있었습니다. 노트북 폴더에 묵혀두었던 오래된 희곡을 꺼내 다시 들여다보고 고칠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저 막연히 꿈꾸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도 이런 순간이 찾아왔네요. 글 쓰겠다고 골방에 틀어박혀 괴로워하던 저를 보며 마음 아파하시던 엄마. 걱정하시던 아빠. 두 분께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어드린 것 같아 기쁩니다. 엄마 조영웅 님, 아빠 김용관 님 사랑합니다. 두 언니 김선희, 김미희와 동생 김기범에게도 저의 울타리가 되어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그리고 작년 겨울 태어난 선우야, 이모가 많이 사랑해. 당선소식을 듣고 전화 너머로 우시던 고연옥 선생님. 선생님의 격려 덕분에 지금까지 희곡을 놓지 않고 쓸 수 있었습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며 축하의 말을 건네주신 배삼식 선생님. 선생님을 만나 처음 희곡을 쓰던 스무 살 무렵이 떠오릅니다. 윤대녕 선생님과 김사인 선생님, 그리고 연극원 선생님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멀리서 절 위해 기도해주시는, 저의 은사 이진순 선생님. 감사합니다.
곁을 지켜준 고마운 사람들에게 마음을 전합니다. 20년 지기 친구 지수. 사랑하는 고등학교 친구들. 현지, 예지, 민, 진명. 소중한 대학 동기 은서와 지연 언니. 멋진 배우 윤지 언니와 세경 언니. 괄호의 사람들. 소연 언니, 효진 언니, 도은님, 민조님. 그리고 늘 나를 응원해주는 용. 모두에게 함께해서 행복하다는 말하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생각이 많았던 한 해였습니다. 저 자신에 대한 의심이 가득할 때면 글을 쓰는 것이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 시간에서 벗어나 저를 좀 더 믿어보려 합니다. 스스로를 믿고 글을 써 나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신 심사위원들과 매일신문에 감사드립니다. 긴 터널 속을 걷다 마침내 선명한 빛을 발견한 것만 같습니다. 그 길을, 열심히 나아가보겠습니다.
◆김진희
1994년 익산 출생
동덕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 전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