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수근 '하시마 섬의 은행나무'
무대는 지하 1000미터의 갱도로 내려가는 수직으로 세운 기둥과 계단 그리고 아래쪽은 조선인 광부들의 숙소로 만들어지고 지상으로 오르는 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그와 대칭되어 영상을 투사할 수 있는 스크린이 역시 기둥으로 떠받쳐지고, 강제 징용된 인물들의 헐벗고 굶주리고 고통에 찬 모습을 비롯해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투하 영상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투사가 된다. 일본군복과 작업복, 그리고 백색 한복이 의상으로 설정된다.
연극은 요양병원의 여의사가 강제징용을 당한 한 노인의 하시마 섬에서의 창살 없는 감옥 같았던 탄광부 시절의 회상을 희곡화 시켜 한 극단의 연출가에게 소개가 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경상도, 전라도, 함경도, 경성 지역에서 일제의 의해 강제 징용된 10대 소년들이 한 명 한 명 등장하고, 53, 54, 55, 56, 57이라는 갱부 번호를 이름 대신 부여받고 노역을 벌이게 된다. 감시하는 일본군 뿐 아니라, 완장을 찬 조선인으로부터 학대와 기압을 받는 장면이 연출된다. 백색 한복 두루마기 차림의 백발노인이 등장해 당시를 회고하며 독백하듯 내용을 펼쳐가면서 하시마 섬에서의 고난의 일상이 차례로 서술되면서 당시 상황이 무대 위에 구현된다. 굶주림 속에서 강제노역을 당하는가 하면, 무차별폭행을 당하고, 창씨개명을 한 조선인의 일제에 대한 과잉충성과 조선인에 대한 냉대와 학대가 묘사가 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고 일본 왕이 항복을 선언하기까지 하시마 섬에 강제 징용되어 노역을 당한 어린소년들은 한 명 한 명 죽어가는 모습을 요양원에 입원한 백발노인의 회상으로 재현되고, 대단원에서 노인 역시 영정사진이 스크린에 투사되면서 계단으로 오르는 모습을 통해 저세상으로 떠나면, 연출가가 의사에게 이 내용을 연극으로 공연하겠다는 약속을 하며 퇴장하는 장면에서 공연은 마무리가 된다.
'두고 보라우, 겉은 탔어도 여서 꼭 새순이 돋아날 거니까’ 하시마 섬에 강제노역으로 끌려가 겉은 새까맣게 탔어도 쓰러지지 않는 은행나무와도 같은 14살 소년의 체험을 담은 이야기다.
하시마 섬(일본어: 端島)은 일본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에 있는 무인도이다. 섬의 모습이 마치 군함과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군칸지마(軍艦島 (ぐんかんじま), 군함도)라고도 불린다.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인을 강제 징용하여 석탄 노동을 시킨 곳이기도 하며 또한 1960년대까지 탄광 도시로서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지만, 폐산 이후 주민들이 이주하였으며, 섬에는 당시의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일본은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신청을 하였으나, 한국의 반대로 지정에 난항을 겪었다. 그후 강제 노역에 대해 명시를 하겠다는 조건을 통해 간신히 등재하였으나, 직후 태도를 바꾸어 강제노동의 사실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1938월 4월 1일, 일본은 일본 점령지를 대상으로 인적.물적 자원을 모두 동원하라는 '국가 총동원법'을 공표했다. 제국주의 야욕에 눈먼 일본이 '중.일 전쟁(1937년 일본의 중국 침략)'을 벌이면서 일본 본토 내 자원만으로는 전비를 충당하고 전력을 강화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한반도에 인력 수탈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일본의 국가 총동원법은 크게 노무 동원과 병력 동원(징병), 군 위안부 세 가지 형태로 진행됐다. 이 가운데 노무 동원은 광산·항만·공사장·군수공장·농장 등 산업 현장에 인력을 배치하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노무자(勞務者)라는 것은 임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을 뜻하는데, 당시 노무 동원된 조선인들 대다수는 강제적으로 끌려갔고, 임금은커녕 허기도 면하지 못한 채 밤낮으로 중노동에 시달렸다. 일본인 감시자들의 폭력 속에서 도망치지도 못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목숨을 잃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일본의 노무 동원이란, '강제 노역'이었던 것이다.지난 2015년 한 지상파 프로그램에 출연한 일본 강제 노역 생존자는 "거기 가서나 탄광인 줄 알았지"라며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다시피 하고 왔다"고 증언했다
조선인 500~800여 명이 군함도로 끌려왔다(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 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의 추정치). 해저 1000m 탄광 갱도로 내려가 평균 45도가 넘는 고온과 95% 습도, 유독가스 속에서 석탄을 채굴했다. 하루 12시간~16시간 일하면서 사료·비료에나 쓰일 만한 찌꺼기로 겨우 끼니를 때웠다. 일본인 헌병이 칼을 차고 이들을 감시했다. 군함도에는 아파트를 비롯해 학교· 병원 등 주거에 필요한 시설이 갖춰져 있었지만, 일본인을 위한 공간이었다. 조선인들은 3평 남짓한 목조건물에 웅크려 자야 했고, 암석에 의한 부상·피부병·과로·굶주림 등 몸이 아파도 방치됐다.
탄광은 조선인들 사이에서 '착취 지옥'으로 불렸다. 하루 17시간씩 일을 하는 것은 물론, 할당량을 채울 때까지 갱내에서 못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아울러 구타가 일상적이었다. 조선인들은 케이블선· 벨트· 목도 등으로 얻어맞으며 생사를 넘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