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용석 '폭력 시대'
알레고리적 특징을 보이는 이 작품 〈폭력 시대〉는 보편적인 것,
즉 거대서시를 드러내는 장치로서 인물을 플롯의 중심부에 위치시킨다.
작가의 의도에서 파악할 수 있듯이, 작가는 이 시대를 혐오의 시대로서 인식하고,
혐오가 폭력의 형태로서 변모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의 표현대로 인물들은 폭력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로서 일상과 사회에서 주변화 되어 있다
이처럼 〈폭력시대〉의 인물들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우화적 장치로서 기능하고 있다.
이들은 국가와 개인, 다수와 소수, 상사와 후임, 아버지와 아들, 남자와 여자라는 관계를 중심으로 사회적으로 고착된 위계질서와 직선적인 힘의 방향을 드러낸다.
동물원 장면으로 시작되는 〈폭력시대〉는 원숭이의 행동과 표정을 반복하는 아들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노출시킨다. 이 행동은 연극 내부에 메타적 장치를 작동시키는 데 지속적으로 작용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들의 주변부를 구성하는 아버지, 민선, 박 중령 모두는 국가에 대한 경례를 한 뒤 원숭이처럼 행동한다. 병원으로 상징되는 이 장면은 집단적 광기와 그 성격을 정확히 드러낸다. 인간성의 상실, 이것은 변모하는 인물들의 행동양식에 의해 점점 더 명징해진다. 작기는 이처럼 인간들 사이의 혐오와 폭력의 관계성을 감각하게 만들고, 동시에 정신병원에 있는 이들의 질문을 통해 이성의 비판적 기능을 작동시킨다. “진실은 힘 있는 자의 선언”이라거나 “건강한 폭력은 몸에 좋다”는 말에 대해 인물들은 크게 반발하지 않는다. 이들의 무기력한 태도는 텍스트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독자와 관객이 사유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틈으로서 작용한다. 바로 이곳에서 수용자의 이성적인 비판은 점점 확대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삶의 원칙으로서 강조하는 ‘진실과 힘’의 왜곡된 관계는 신자유주의 자본- 욕망의 작동방식과 그대로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알레고리적으로 연극의 보편성과 시대의 비판적 목소리를 확대시킨다. 이처럼 〈폭력시대〉의 텍스트는 연극적 알레고리와 이성적인 비판을 변증법적으로 결합시키는 수행적 영향력을 내포하는 특정을 나타낸다.
작가의 글
혐오의 시대이다. 나와 생각이 다른 상대에게 망설임 없이 혐오의 빗장을 걸어버리는 시대가 되었다. 틀림과 다름의 경계가 모호해진 지는 이미 오래되었고, 단순한 차이도 혐오해버리는 일이 부지기수이다. 광장의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그러하고. 다른 믿음을 가졌거나 성적 지향성이 다른 상대를 향해, 심지어 남성과 여성도 두 갈래로 갈라져 서로에 대한 혐오를 부글부글 끓이고 있는 요즘이다. 이 혐오는 가라앉지 않고 점점 심해지고 있는데, 심지어 최근에는 적극적인 폭력의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강남역에서의 살인사건이나 국가적인 재난에 대한 조롱 섞인 야유는 이 혐오가 얼마나 심각한 폭력으로 변모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 당사자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피해자의 안에 남아있던 가해자의 폭력은 어딘가에서 또 다른 누군가를 향한 폭력으로 발현된다. 이렇게 피해자는 가해자로 새로운 피해자는 또 다른 가해자로 전환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폭력은 개인과 개인 사이만을 오가지도 않는다. 폭력의 확장성은 예측할 수가 없어서 개인에서 집단으로. 집단에서 집단으로, 집단에서 개인으로, 혹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또는 그 역으로 얼마든지 확대되거나 집약되고 색깔이나 형태를 바꾸거나 왜곡시켜서 전달되고 전이되고 전염된다.
이 극을 통해 폭력의 실체를 해부해보고자 한다. 물론 너무나 많은 종류의 폭력이 존재하기에 이것이 모든 폭력의 근원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사과의 맛을 알기 위해 당도를 재는 단위인 브릭스(brix)로 표현을 하는 것보다 사과를 먹은 사람의 반응을 이야기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경우가 있는 것처럼, 그 폭력의 고리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어느 새 그 일부가 되고 마는 한 소외된 인간을 드러내는 것이 폭력의 본질을 이해하기에 효과적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질문할 수 있으리라. 나는 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나는 폭력의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나는 지금 어디에 서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