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석 '불모지'
「불모지」(1957)는 전후 사회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혼란을 느끼며 방황하는 인물들의 삶을 세대간의 갈등을 중심으로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제목이 상징하고 있듯이 도시의 음지에서 살아가는 한 가족의 몰락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의 무대공간은 고층빌딩 사이에 자리 잡은 낡은 기와집이다. 이러한 무대는 현대문명의 틈바구니에서 소외당하는 서민들의 모습을 상징함과 동시에 전통과 현대의 갈등이라는 기본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작품 내에서 구세대인 최노인과 신세대인 자식들과의 갈등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최노인 가족이 겪는 갈등은 집의 매매문제로 표면화되는데 그것은 현실 대응방식과 관련된 세대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최노인의 가족은 둘째 딸, 경운이가 출판사 식자공으로 벌어오는 돈에 의지해서 살고 있다. 최노인이 하던 전통 혼구 대여점은 신식 결혼풍조로 인해 문을 닫은 지 오래고, 제대군인인 장남 경수는 실업의 상태이며 장녀 경애는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허영에 빠져있다. 그러나 최노인은 50여 년 동안 살아온 집을 분신처럼 여기고 집을 팔자는 가족들의 실리적 요구를 묵살한다. 경제적 빈곤에 시달리면서도 집을 고수하려는 최노인의 고집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집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햇볕도 안 드는 마당에 화초를 기르며 자신의 정성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현실을 비난한다. 그러나 자식 세대는 전통적 가치보다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고등학생인 경재는 물론이고 가족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경운 역시 현실 적응 논리를 편다. 결국 최노인이 가족을 위해 집을 팔겠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지만 허영에 빠져 순결을 잃은 경애는 자살하고, 자살충동에 시달리던 실업자 경수는 강도 행각을 벌여 검거 당한다.
이렇듯 「불모지」는 구세대와 신세대의 현실 인식과 그 대응양태를 중심으로 한 갈등을 기본구도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세대갈등은 그리 치열하지 않다. 가족애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경운, 경재는 가족의 갈등을 사랑으로 감싸고 있으며 최노인의 매매 결정도 가족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경애 또한 영화배우가 되면 가족의 어려움을 일시에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경수의 좌절도 결국은 장남으로서의 경제적 책임을 못하는 것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그러므로 「불모지」의 세대갈등은 구세대와 신세대 중 어느 한 쪽이 추구하는 가치가 더 우위에 있다는 판단의 기준으로 설정한 것이 아니다. 작가는 전후 사회에 밀려든 서구화 풍조와 물질문명 앞에서 몰락할 수밖에 없는 전통적 가치와 인간의 소외를 고발하기 위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구세대와 신세대를 제시한 것이다. 즉 최노인 가족의 몰락을 초래한 현실 상황에 대한 반영은 있으되 그러한 상황에 대한 가치판단은 보류하고 있다. 따라서 전통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시대의 변화를 애써 외면하는 구세대를 옹호하지도 않으며 현실의 적응에 실패하고 현실을 극단적인 방법으로 부정하는 신세대를 옹호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한 가족의 삶을 비극으로 몰아간 사회의 구조적 원인이 무엇인지도 규명하지 않는다. 다만 그러한 현실을 객관적이고 냉정한 시선으로 재현하고 있다. 그러나 불모지로 비유하고 있는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대안은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이 작품에서 긍정적 인물로 형상화되어있는 경운과 경재를 통해서 드러난다. 이들은 가족의 갈등을 이해와 사랑으로 완화시킴으로써 가족의 유대관계를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가족이 함께 잘 살아가는 것, 그것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아가야 한다는 자세를 보여준다. 결국 차범석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구세대와 신세대에 대한 가치판단을 보류함으로써 전후 사회의 변화를 거스를 수 없는 힘으로 인정하고, 가족애로 암시되는 타인에 대한 사랑과 유대관계가 혼란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다는 휴머니즘을 제시한 것이다.
「불모지」는 전후 사회에서 가치관의 혼란을 겪는 구세대와 신세대의 전형으로 인물을 형상화하는데 성공하고 있으며 치밀한 극적 구성으로 현실의 파괴적인 힘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 의해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 최노인 가족의 비극을 그림으로써 환경의 영향력을 절대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인간의 구원을 위한 대안도 소극적인 선에서 그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