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성준기 '도둑들의 바캉스'

clint 2025. 11. 30. 05:27

 

 

 

이 극 속에는 두 가지 재미있는 상황이 주어지는데 젊게 얼굴을 고쳐주는

양귀비 성형외과가 메스컴을 장악, 시민들을 유혹하고 있고, 

찌는 더위를 피해 피서를 떠나고 없는 빈집에서 도둑들이 주인 행세를 하는

4박 5일의 아파트 바캉스가 온 도시에 유행처럼 퍼지게 된다. 

대부분의 시민들이 도둑 바캉스에서 훔친 물건을 팔아 양귀비 성형외과를

찾는 것이 한창일 때, 극이 시작된다. 

우리 이발소 주인집 딸이 4박 5일간의 바캉스를 떠난다는 글을 남긴 체,

가출한다. 이에 당황한 이발소주인은 경찰소로 달려가 가출 신고를 하는데-

그때 경찰도 무려 3,956통의 가출 신고 전화를 받고 녹초가 되어있다.

이발소 주인은 경찰과 말싸움 끝에 쫓겨나고 그의 부인도 친구의 전화를 받고

도둑 바캉스를 떠난다. 집이 비어있는 사이, 젊은 한쌍의 도둑 바캉스 족이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며 놀이를 하는데, 또 다른 도둑이 등장하고,

뒤이어 가짜 형사, 가짜 경찰이 차례로 등장해서, 희한한 술래잡기가 벌어진다.

결국 모두가 도둑이라는 게 밝혀지고, 서로 쫓고 쫓기는 마라톤을 연출한다.

한편, 많은 사람들의 바뀐 얼굴 때문에 사회적인 커다란 부작용이 발생하자

매스컴을 통해 자기 본래의 얼굴을 찾자고 계몽하지만

곧바로 양귀비 성형외과의 C.M. Song이 흘러나오고 만다.

 

 


이 작품은 도둑의 개념이 희박해진 현대사회와

또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하고 싶어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풍자하고 있다.

다소 작위적인 상황과 말장난들이 이어지며 재밌는 상황을 연출하여

재미있게 웃다보면 뭔가 사회를 꼬집는 날카로운 풍자가 들어있음을 느낀다.

 

 

 

작가의말//성준기 <연극, 그것은 뭣인가?>>

작가(作家)로서의 기본적(基本的)인 소양(素養)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글쓰는 일에 뛰어든 나로선, 시간(時間)이 갈수록, 자신의 무지(無知)에 대한 두려움이 눈덩이처럼 물어나고 있다. 태어나길, 철저한 속물(俗物)로 태어난 나로선, 남들처럼, 그 어렵고 고상하고, 삼삼한, 소위 전형극(前衡劇)인가, 현대극(現代劇)인가, 하는 그 버터 내음 솔솔 나는 지적(知的) 예지가 번뜩이는, 그런 작품(作品)은 내 평생(平生) 단 한편도 못 쓸 것이고, 또 쓸 마음도 없다. 어차피, 나 같은 속물(俗物)이 쓸 수 있는 극작(劇作)이란, 나 같은 삼등인생(三等人生)들이, 이 화딱지 나게 신경질 나고, 살맛 안 나는 세상에서, 웃기는 인생들이 벌이는, 웃기는 인간사(人間事), 소극(笑劇) 밖에 쓸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허나, 나같이 무식(無識)한 연극 문외한(門外漢)에게도, 나름대로의 연극에 대한, 한, 두 가지의 소견(小見)은 있다. 그건, 연극이 절대로 그들 지식인들만의 전유물(專有物)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다. 누가 그랬던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놈은, 무식한 놈이라고 했겠다. 난, 무식한 놈이니깐, 무식한 소리 좀 지껄이겠다. 생각해 보라. 지금껏, 우리 연극은, 첨단적인 유행복(流行服)을 무대(舞合) 위에 올려놓는, 패션쇼 같은 풍조(風潮)에 밀려 다녔다. 무대(舞臺)마다, 속물(俗物)들은, 알다가도 모를 그런 애매몽롱한, 서양(西洋)도깨비들의 철학(哲學)강의가 범람하면서, 연극은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아무나 가까이할 수 없는, 고등인생(高等人生)들의 "지적(知的)유희"라는 선입관이, 숱한 무민(無民)들의 가슴에 뿌리를 내리면서, 언제부터인가, 연극하는 그들 연극 전문가들이 스스로 관용의 폭을 제한해 버리는, 기현극(奇現劇)이, 진짜 연극속의 '재미'를 송두리째 증발시켜 버렸다. 오호, 통재라, 슬픈지고, 버터 냄새 솔솔 나는, 그런 연극을 무대에 올려야 진짜 연극을 한답시고, 어깨에 힘 주는 그들 고명하긴 연극 전문가 님들의 입김이 판을 치는, 이 나라의 연극 풍토(演劇風土)여! 나는 알고 있다. 그들 저명하신, 연극 전문가 님들의 눈엔, 이 하찮은 통속소극물(通俗笑劇物), <도둑들의 바캉스>가, 일고(一考)의 여지도 없는 졸작(拙作)이라는, 신랄한 경멸의 소리를 감수할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추고, 나는 감히, 이 졸작(拙作)을 세상에 내놓는다. 그 가당찮은 무기는 작가인 나보다는, 이것을 무대화(舞臺化) 시켜보겠다는, 극단 춘추의 용단에, 실로 박수를 보낸다. 극단 춘추는 파리의 유행복을 무대 위에 올려놓고, 자만하는, 그런 자기과시 식의 연극이 아니라는 넘은 이 극을 통해서도 분명히 피부에 감지될 것으로 믿는다. 그들은, 오직 연극 을 하겠다는, 핏빛 정열과 뜨거운 열기의 하나로, 이 무명작가의 하찮은 작품을 무대에 올려놓는, 그 후끈한 연극에의 정열이, 언젠가는, 반드시 쨍하고 해 뜰 날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바라건대, 관객 여러분? 이  연극에서 고상한 주제나, 철학을 얻고자 하는 자, 아예, 집으로 돌아가시라. 그들이 얻을 것이라곤, 오직 시간낭비일 뿐이다. 허나, 인적 드문 산골, 이름 없는 풀잎처럼 살아온, 연극을 모르고, 연극의 재미를 갈구해 온 우리 삼등인생들이여? 그대들은 오랜만에, 느슨한 기분으로, 허리끈 풀어놓고,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속물들의 소극에 껄껄껄 웃다가, 징치고 나팔 불며, 막내리면 안녕히 돌아가 주시오. 그리고 기억해주십시오.  연극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닌, 내 가까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또, 한가지. 이 몽롱한 세상에서, 그래도 한 사람, 속물들을 위한, 속물연극을 쓰는, 속물작가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도, 부디 잊지 마시고 연극을 사랑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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