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황정은 '애인愛人'

clint 2024. 9. 26. 13:04

 

 

 

어느 조그만 섬의 응접실, 아이와 노인 등의 사람들,
강아지와 고양이 등이 함께 티를 마신다.
그들의 찻잔에 티메이커가 차를 따라주고 있는데,
갑자기 한 남자가 등장한다.
이곳이 어딘지 몰라 멀뚱대는 남자와
그런 남자를 태연히 바라보는 티메이커.
이곳은 죽은 자들의 몸이 잠시 쉬어가는 곳이다.
차를 마신 후 더 깊은 잠에 빠져 강을 건너면
완전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
모든 상황이 어리둥절하지만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
자신의 죽은 연인을 찾는 남자.
그러던 중 거짓말처럼 알 수 없는 그 응접실에서
죽은 연인을 만나게 되고,
함께 다시 밖으로 나갈 것을 권한다.
하지만  이 상황을 알지 못하는 연인은
티메이커의 차를 마시고 잠에 든다. 
잠에 빠진 그녀를 안고,
남자는 망각의 강으로 뛰어드는데....

 

 


황정은 작가의 <애인愛人>은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인물이 삶에 닥친 재난으로
찬란한 한때를 송두리째 잃어버리게 된 후,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발생하는 이야기다. 
“ 내 삶은 여기 있어. 네 삶은 저기 있고. 뒤돌아보지 말고 나가. “
고대 그리스의 오르페우스 신화를 모티프로 삼아, 죽음 혹은 과거를 거스르려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삶의 일부분이 어떠한 재난으로 사라졌을 때,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재난으로 과거와 단절되었을 때, 그 과거를 온전히 과거에 둘 수 있는지, 우리는 어떻게 다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더 이상 ‘삶’과 ‘재난’을 구분 지을 수 없는 이 시대에,
연극 <애인愛人>은 재난과 죽음,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를 건넴으로써 동시대 관객들에게 사유와 위로를 전달한다. 

 



리뷰 : 성수연(요다)
신화의 세계는 밑도 끝도 없다. 그 밑도 끝도 없음에서 잔혹함이 나온다. 그리스 신화에서 음유시인 오르페우스는 죽은 연인인 에우리디케를 다시 살려내기 위해 지하세계로 간다. 오르페우스가 연주한 음악에 감동한 죽음의 신 하데스는 단 한 가지 조건하에 에우리디케를 데려갈 수 있다고 한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길에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 것. 이 말은 이 세계의 절대적 법칙이 된다. ‘왜?’라는 질문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냥 그래야 한다.  
오르페우스 신화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연극 <애인>의 세계도 밑도 끝도 없다. 공연이 시작되면 지하세계의 우아한 티타임이 벌어지고 있다. 그곳에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의 눈물로 차를 내리는 티메이커가 있고, 영혼들은 그곳에 체류하는 일주일 동안 매일 그 차를 마셔야 한다. 그 기간이 지나면 영혼들은 배에 태워져 ‘윗물’로 향한다. 이것이 이 세계의 존재방식과 법칙이다. 윗물에 무엇이 있는지 아직 모른다. 영원한 안식? 천국? 지옥? 인물들의 말로 구축되는 이 세계가 그곳에 대해서까지 발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미지의 세계는 인물들의 말에 따라 확장되고 좌지우지된다는 감각을 준다.  

 

 


10년 전 죽은 애인 윤서를 그리워하다가 지하세계에 도달하게 된 정오는 윤서를 지상으로 다시 데려가려 한다. 하지만 신화 속 인물들이 속수무책이듯이 윤서와 정오 또한 이 세계의 법칙들에 따를 수밖에 없다. 이 법칙들에 어떤 합리적 근거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것도 아니다. 망각의 강을 떠내려가는 둘 앞에 지상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대신 대가를 원하는 물고기가 나타난다. 물고기는 말한다. 지금부터 세 번의 탈출 기회가 있을 것이다. 다만, 정오는 뒤돌아 윤서를 보면 안 된다. 마지막으로 ‘왜?’라는 질문은 금지이다. 인식 체계 밖의 것을 설명하려는 욕망과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상충하면서도 공존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계절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페르세포네 신화를 지어냈지만, 신화의 세계는 현실을 닮았기에 그 안에서도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법칙들(‘지하세계의 음식을 먹으면 지상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와 같은)이 만들어진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신화로 설명하려는 마음은 예고 없이 닥쳐온 재난을 과학적 원리로 밝혀내려는 마음과도 비슷할 것이다. 윤서와 정오는 강물과 하늘에 그들의 과거가 비치는 것을 본다. 살아있을 당시 연구원이었던 윤서는 지진이 빈번해지는 현상에 대해 지구의 외핵 안에 거대한 물의 세계가 존재하며, 이 물의 이동 때문에 지진이 발생하고 있다는 가설을 세운다. 하지만 윤서는 가설을 증명하기 전에 지진 현장에서 죽고 정오는 인생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윤서를 잊지 못한다. 밑도 끝도 없는 이 상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밑도 끝도 없어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사실 지하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 한가운데에서도 벌어진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또한 밑도 끝도 없이 벌어지며, 잃는 일 또한 그렇다. 점점 깊은 과거로 떠내려가면서 20년 어린 윤서와 정오가 등장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둘은 싸우고 있지만 미래의 둘과는 서로의 입장이 바뀌어 있다. 어린 윤서가 어린 정오에게 말한다. “난 네가 그냥 싫어. 왜냐면 난 네가 그냥 좋았거든. 그래서 네가 그냥 싫어.” 연인들의 싸움이 그렇듯 말은 서로를 설득하지 못한 채 어떤 사실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네가 그냥 싫어”라는 말에 대해 “왜?”라고 묻는 것은 무용하다. 그냥 그런 것이다. 사랑처럼 불가해한 것과 갑작스러운 상실이, 인물들이 밑도 끝도 없이 휩쓸리는 이 세계를 구성한다. 이런 잔혹한 세계에 ‘왜?’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은 다만 관객뿐이다. 하지만 객석에 앉아 연극을 보면서 떠오른 이 ‘왜?’는 의심이 금지된 세계에서 ‘왜 다른 방식일 수 없는 거야?’라고 안타까워하며 인물들을 응원하는 마음인 한편 극중 세계의 리얼리티를 의심하는 질문이기도 했다. 허구의 세계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리얼리티가 필요하다. 이 불확정적 법칙들이 난무하는 지하세계는 불안한 현실에 대한 은유로 읽히기도 했지만, 극이 진행되며 불쑥불쑥 등장하는 새로운 법칙들은 이야기 자체를 의심하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연극은 푸른빛과 흰 천들로 지하세계의 공간성을 만들어내었으며 무대 양옆으로 노출되어 있는 조명과 SF적이라고도 느껴진 음향효과로 지하세계의 비현실적 감각을 집요하게 만들어낸다. 특히 양 갈래 꽁지머리를 하고 도치법으로 자기소개를 하는 물고기 역의 배우 지춘성은 그 능청스러운 현존 자체로 지하세계의 존재를 설득했다. “난 물고기야. 빛나는 물고기. 한때는 날았던.”

 

 

 


그리스 신화는 지상으로 올라가는 길에 참지 못하고 결국 뒤를 돌아본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잃고 그녀를 그리워하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도록 한다. 연극 <애인愛人>이 오르페우스 신화와 다른 점은 윤서가 자발적으로 지상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선택한다는 것과 지상으로 돌아간 정오가 윤서에 대한 기억을 전부 잃는다는 것이다. <애인愛人>에서 ‘뒤돌아봄’은 과거를 회고하고 후회하는 행동과 맞닿아있다. 극은 윤서의 죽음 이후 지하세계의 시점과 윤서와 정오의 과거시점을 병렬적으로 교차시킨다. 가장 가까운 과거부터 둘이 처음 만난 시점까지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며, 무대 위에 표현되지 않은 시간이지만 정오가 윤서를 잃고 10년간 곱씹어 보았을 장면들을 보여준다. 과거를 돌아보고 후회하는 데 따르는 대가는 고통이지만 돌아보기를 멈출 수 없다. 정오는 지상으로 돌아가고 윤서는 지하에 남기로 한 순간 정오는 윤서에게 “어떻게 돌아보지 않을 수 있냐"고 묻는다. 하지만 지상으로 돌아온 정오에게 더 이상 윤서에 대한 기억은 없다.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을 애도할 수 있을까? 정오의 기억에서 윤서의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는 결말은 다소 의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오는 여전히 어떤 슬픔을 감지한다. 잃은 것이 없음에도 잃었음을 감지한다. 기억할 수 없지만 어떤 사람의 자리가 비어있다. 그것은 잔혹한 지하세계의 법칙에 의한 강제적 공백이다. 기억되지 못하는 죽음들이 떠올랐다. 국가와 사회의 법칙에 의해 기억이 금지된 죽음들 말이다. 뒤돌아보지 말고 강을 따라 앞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지하세계의 법칙은 지상세계의 법칙이기도 하다. 뒤돌아보고 후회해도 이미 지나간 것은 삶에서 바뀌지 않는다. 다만 연극은 윤서가 죽은 뒤에도 삶을 계속 살도록 한다. 기억을 잃은 정오와 달리 서로를 기억하기로 선택한 고양이와 강아지도 함께이다. 윤서는 정오의 눈물로 내린 차를 마시고 윗물로 갈 수 있게 된다. 윗물에서 어떤 삶이 벌어질지까지는 아직 이야기가 도달하지 않았다. 그 공백의 세계에서 이번에는 윤서의 말로 더 이상 잔혹하지 않은 신화가 지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황정은 극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