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대전 형무소. 찌는 듯한 더위에 숨이 턱턱 막혀오는 여름.
살인범과 마주하는 독방에 갇혀 있는 초로의 ‘강복’.
진료도 받지 못한 채 위통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그는
자신과 살인범의 독방 사이의 어두운 복도에
샛노란 은행잎이 떨어져 있는 걸 발견한다.
납득이 되지 않는 은행잎의 출현으로 살인범에게
연극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강복. 그는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던 살인범을 연극이라는 환상의 세계로 안내한다.
1945년 여름. 해방을 맞이한 좌익 연극인들은 ‘조선연극 건설본부(연건)’를
구성하는 등 새 세상에 대한 기대에 들떠 있다.
그들 중 한 명인 강복은 연극인이라면 어떤 정치 활동이라도 연극을 통해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의 주장대로 연건은 그 밑에
‘조선 예술 극장’이라는 극단을 두고 러시아 볼셰비키 작가인 키르숀의
‘폭풍의 거리’를 무대에 올린다.
투르크의 침략을 물리쳐준 영국군이 떠나지 않고 또 다른 점령군이 된,
영국 군정 치하의 아르메니아를 그린 ‘폭풍의 거리’는
일본이 축출되고 미국과 소련의 군정이 들어온 조선의 상황에 절묘하게
들어맞는 작품이다. 마치 조선 정치와 연극계를 보는 것처럼
극 중에서도 좌익 혹은 공산주의자에 대한 백색테러가 횡행한다.
그러는 와중에 맞선을 보게 된 강복은 상대인 순옥에게 한눈에 반한다.
행여 그녀가 퇴짜를 놓을까 두려워 자신이 실은 와세다 중퇴자에
좌익 연극인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못하는 강복.
신탁 통치를 둘러싼 탄압에 이어 우익 깡패들의 극장 난동, 군정 경찰의
체포와 고문이 이어지는 상황. 탄압이 견디기 힘들만큼 거세어지자,
당시 신극의 주류였던 좌익 연극인들은 하나둘씩 월북을 감행한다.
절망감에 휩싸인 강복. 그런 그에게 순옥이 찾아와 ‘좌익에 연극쟁이’인
그와 결혼하겠다고 한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두 사람.
연인이 손을 맞잡은 거리엔 마치 그들의 앞날을 예고하기라도 하듯
거센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다시 71년의 대전 형무소. 살인범은 강복이 보여준 연극이라는
신세계와 좌익 연극인들의 삶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살인범은 강복을 비롯한 좌익 연극인들이 ‘진짜 세상’은
모르는 먹물들일 뿐이라고 한다. 그들은 목숨을 바쳐가며
프롤레타리아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려 했지만,
정작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모르는,
지금 강복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모른다는 것. 그는 자신이 먹을 것을 훔치러 들어갔던 가정집에서
맞닥뜨린 여학생을 강간하고, 막으려던 그 어머니를 살해한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절규한다.
이런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은 개죽음을 한 거라고….
우여곡절 끝에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는 강복.
이제 그들 앞엔 1948년의 세상이 펼쳐진다.
상연 금지와 체포, 투옥이 반복되자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몰리게 된 강복과 좌익 연극인들.
마침내 절친한 사이였던 황철마저 월북을 결심한다.
통일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만 피신하고 있으라며
아내가 된 순옥마저 강복의 등을 떠미는데…
순옥이 싸준 짐까지 들고 나왔던 강복은 같이 떠나기로 했던
황철에게 자신은 남겠다고 한다. 산에 불이 나면 날개 달리고,
다리가 있는 동물들은 달아날 수 있지만,
미련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식물들은
그 자리에 서서 타 죽을 수밖에 없다고…
돌아와 순옥과 아기를 끌어안는 강복.
거리엔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월북해 활동을 재개한 현실의 좌익 연극인들과는 달리,
연극 ‘폭풍의 거리’ 속 주인공들은 모두 영국군정에 의해 총살을 당한다.
그리고 극심한 위통에 신음하며 자신이 곧 죽을 거라는 강복.
살인범은 죽으면 안 된다고, 밖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줘야 한다고 하며 간수를 부른다.
그런데… 점점 나무로 변하는 강복.
그것도 말라비틀어진 고사목으로…
강복은 서서 죽은 나무 한 그루가 누군가에게 정상에 오르는
이정표가 되길 바란다며, 이 땅 어디에선가 연극이라는 아름다운 동산이
태어나길 바란다고 한다. 강복의 죽음 위로…
현재 대학로에서 땀을 흘리며 연극을 만들고 있는
연극인들의 수많은 모습들이 영사된다.
작가의 글 – 신성우
이 작품은 해방 이후 동료 연극인들 대부분이 월북할 때 남한에 남았던, 68년 ‘남조선 해방 전략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71년 위암으로 옥중 사망한 이강복이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연극인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후대의 우리들에겐 그나마 황철이나 심영 같은 유명 월북 인사들의 행적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지만, 이강복 같은 무명의, 더군다나 월북하지도 않은 연극인의 삶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남조선 해방 전략당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영 그의 이름을 알지도 못했을 거다. 저는 그의 삶을 기억해내고 재현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사라져간 잊혀져 간 연극인들을 기리고자 합니다. 어쩌면 과거의 그들이 우리들의 미래의 모습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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