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건청 '폐항의 밤'

clint 2023. 11. 23. 07:44

 

 

<폐항의 밤>은 방파제 끝의 등대불이 켜 있지 않은 폐쇄된 항구에 한 남자가 직장을 구하기 위하여 폐항 주식회사를 찾아와 일자리를 구한다. 그러나 회사측은 일자리를 찾아온 사람은 밧줄을 타고서 유리창을 닦는 일이 직업이기 때문에 잘못 찾아온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사나이는 폐쇄된 이 항구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자신 뿐이라고 말한다.

남자A는 폐항에 살면서 무너진 다리를 고치는 일에 전념한다. 다리가 무너져 통로가 막혀버린 사람과 사람 사이를 복구하려는 집념으로 그는 부단히 망치질을 하며 폐항을 벗어나려 한다.

남자B는 고층빌딩의 유리창 닦기를 유일한 극복의 수단으로 택한 남자다. 그는 하나의 로프에 매달려 높은 빌딩의 외벽을 오르내리며 하루 속히 날개가 자라길 기대한다. 그리고 또 한사람, 여자. 영아를 낙태시킨 후 석녀가 되어버린 그는 자기 몸에서 떨어져 나간 4개월 된 태아의 환상에 쫓긴다. 한 마리 작은 새가 된 낙태아의 환상 때문에 괴로워하는 그녀는 자신도 역시 새가 됨으로써 자신 이 처한 폐항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작가의 글 - 李健

〈현대시를 위한 실험 무대〉의 5번째 바톤을 이어받으면서 「시극」 이란 무엇인가라는 가장 원초적인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정신의 무대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언어의 外延과 延과의 충돌을 어떻게 相補的 관계로 화해시킬 것인가, 더구나 言語 이외의 表現媒材에 둔감한 내가 어떻게 무대위에 뽀에지를 구체화할 것인가... 이런 문제점들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이런 문제점들에 대한 해답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문제제기로 써진 것이 이 「港의 밤」이다.

나는 두 사람의 남자와 한 사람의 여자를 港에서 만나, 그들이 어떻게 港을 벗어나는가를 주의 깊게 살펴보기로 하였다. 港은 사용할 수 없는 港口이다. 배가 떠나고, 떠난 배들이 돌아올 귀향지, 이곳이 항구인 것이다. 그러나 港에 묶인 배들은 떠날 수 없으며 떠난 배들 역시 돌아올 수가 없다. 별안간 河床이 높아져 쓸모 없이 버려진 港ㅁ, 이것이 港이다. 기계화되고 규격화된 삶을 영위해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 하게 대두되는 문제점의 하나가 휴머니티의 상실이다. 서로의 통로가 막힌 채 고립화된 사람들, 그들은 하나하나의 개체로 존재할 뿐, 인간적 유대감이나 상호 신뢰의 삶으로부터 벗어나 있을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황막한 폐항에 떠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폐항은 자꾸자꾸 그 넓이를 확산시켜가고 있는 것이다. 심각한 문제점이 아닐 수 없다. 詩劇 「港의 밤」은 도처에 산재한 폐항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나는가를 보 여주는 세 사람의 이야기이다. 이들 두 남자와 한 여자가 보여주는 것이 비록 극복을 위한 작은 몸짓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이들이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삶의 의미는 하나의 환기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港에 함몰되지 않으려는 안스러운 몸짓을 포기하지 않는 한, 구원의 가능성도 존재할 것이기에 말이다.

 

 

작가 李健

1942년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 한양대학교 문리대 국문학과와 대학원 국문과를 거쳐 한양 대학교 문과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했다. 196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시단에 나왔으며, 이후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았다. 동인운동에도 관심을 보여 「現代詩」동인으로 활동했으며, 詩劇 운동 「현대시를 위한 실험무대」에도 관여하고 있다. 저서로 시집 「이건청 시집」「목 마른 자는 잠들고」 등이 있으며, 尹東柱 평전인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文學論」 등이 있다.

 

폐항의 밤/ 이건청

 

겨울에도 출렁였다.

묶인 배들은 기우뚱거리고

항혼 속에 흔들이는 빈자의 손,

앙상한 숲을 바라보고 울었다.

 

늦기 전에 가리라.

방파제 너머로 몰려와 부서지는 지겨운 시간들,

남은 것들이 하얗게 부서지는 밤바다

, 묶인 배들은 묶인 채 울고

굵고 튼튼한 끈 위에 눈이 쌓였다.

우리는 알지도 못하면서

기우뚱거릴 뿐, 피를,

잘려 나가는 육신을 견디고 있다.

 

저 막막한 눈보라 속으로

껌정신을 끌고 갔다.

늦기 전에 가리라.

흰 옷을 입은 남자들이 휠체어에 실려

분수가 쏟아지는 마을의 긴 골목을

밤새도록 밀려가고

이 세대의 폐항에

들어온 배들이 굳게 굳게 묶인다.

묶인 채 기우뚱거리며

눈보라 속에 있다.